오랜만의 리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니 글을 먼저 읽고 오시는걸 권장합니다. 리뷰 본문을 가리기엔 모든게 스포일러라 애매하네요.
정말 정말 재미있어요. 후회없는 선택. 보장합니다.
그리고 슬프고도 불행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공백 줄바꿈을 할 수 없는데 다른 리뷰는 멀쩡한걸 보니 제 쪽 오류인것 같습니다. 이유 확인되는대로 수정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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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L;DR
작품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보여주고, 보여줌으로써 생각하게 합니다. 무척이나 정교하고 치밀하게요. 이 감상은 제가 나름대로 읽은 결과입니다. 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이 글이 답을 전제로 써진 글이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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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저는 요즘 말이 많은 러닝 크루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인터뷰마다 깊이 생각하게 되어서 읽는 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흡인력 있게 쭉 읽히는 글이지만 인터뷰 하나하나를 흘려넘기고 싶지는 않았어요.
어쨌든, 오늘도 질문으로 하나 시작해 볼까요.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고 있는 질문이요.
1. 그래서 러닝맨은 뭘까요.
2. 그리고 카메라맨은 누구일까요.
3. 이건 무엇에 대한 기록일까요.
이 질문은 첫 인터뷰부터 독자의 머릿속에 자연히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 답을 글이 제시할 것이라 기대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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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맨, 투사의 결절점에서
이 글은 인터뷰 하나가 질문을 던지면, 그 다음 인터뷰에서 답을 내는 구성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질문을 던지죠. 대사로만 이루어진 형태까지 사고를 가속하기에 모두 적합했습니다.
모두가 러닝맨에 대해서 말하지만 러닝맨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터뷰라는 단순한 형식에서도 드러나는 인물들의 생동감과 그들의 얽힘으로 러닝맨은 인터뷰를 층층이 쌓으며 입체적이어집니다. 글의 장점은 질문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인물을 조형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어렵지 않게 흐름을 따라오게 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게 더욱 러닝맨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죠. 정말로, 필력이 놀랍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계속 좋다는 말만 반복하는데 어쩔 수 없습니다. 리뷰어이기 이전에 저는 독자니까요.
삼분의 일쯤… 네 번째 인터뷰인가요, 케빈 로어의 인터뷰까지 읽고 나면 독자는 자연히 알게 됩니다. 이 글은 러닝맨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겠구나. 그리고 그게 글의 내용이구나.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알 수 없는 러닝맨의 정체가 아니라 사람들, 인터뷰이들의 말에 집중하게 됩니다.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전환, 거기부터 제시되는 정보의 밀도가 글에 흥미를 잃지 않는 선에서 던져지고 회수됩니다. 이렇게 해석의 여지를 쫓아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이 정말 정말로 좋았어요. 퍼즐 같다고 해야 할까요.
러닝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까요. 여기서 호주인 토비 얼라이즈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겐 러닝맨을 막을 방법이 없었어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러닝맨의 정체보다는, 왜 사람들이 러닝맨에 이렇게까지 열광하는지가 아닐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따라붙기만 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들의 의지는?” 여기에선 사회적 현상, 열병에 가까운 추종… 그러다 믿음이 떠올랐어요.
질문을 바꿔봅시다. “믿음에 이유가 필요한가요?” 작품에서 일관되게 던지는 러닝맨의 메타포는 ‘종교’ 또는 ‘신’입니다. 직접적인 12사도 은유가 나오고, 실제로 신처럼 묘사되는 인터뷰가 두 가지 있으며 마지막의 카메라맨 역시 ‘신이냐’고 묻는 대사가 나오죠. 그렇다면 러닝맨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봅시다.
그렇게 보면 작품은 꽤 선명해집니다. 작품 안에서 러닝맨은 달릴 뿐 한 번도 말하거나 상호작용을 하지 않죠. 그저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제 1메이트이자 베드로인 에드워드 하워드는 구원받고, 샘 하밀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러닝맨을 핍박하며1, 프리워킹의 창립자 케빈 로어는 자신을 유다라고 부릅니다.2 (금전을 위해 팔아넘겼다는 점까지) 그 외의 인터뷰에서는 특정 종교가 아닌 다른 문화권의 신 또는 관념적인 의미의 신이 호출되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무교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떠올리는 그 특정 종교와 다른 점은 이겁니다: 의지도, 의도도 없다.
왜? 그 ‘의도’에 대한 이야기는 중반 이후에 회수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러닝맨의 행동은 일관됩니다. 노출되고, 곳곳을 누비고, 멈추지 않는 게 전부죠.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가 각자의 목표를 가지며 러닝맨을 따르고, 그 결과는 하나로 모여요. 밖으로 나오는 것, 몸을 움직이는 것, 뛰는 것, “그게 무엇이든 실행에 옮기는 것.” 러닝맨으로부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겁니다. 그는 그 자체로 돈을 벌어다 주는 뮤즈이고 간절한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이며, 불가침 영역이자 전광판입니다. 세계가 그에게 투사되는건 어쩔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빈 공간을 채우려 하는건 사람의 습성이나 다름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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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오래된 질문, 특이점과 능동성
중요한 건 린 샹의 인터뷰입니다. 여기서부턴 AI가 전면에 나옵니다. 착실하게 종교와 믿음 메타포를 쌓아온 이 글도 AI를 얹습니다. 사실 AI라는 직접적인 단어가 나오는 순간 어쩐지 꿈같은 이 글은 현실로 내려옵니다. 공상 같은 존재이던 러닝맨이 해석과 분석을 할 수 있는 실재가 되죠. 요즘 AI 소재 없이 글을 쓰지 못하냐는 말도 있는데, 지금 같은 때 AI 얘기를 안 쓰면 언제 쓰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요즘 AI 담론은 종교나 믿음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그러면 함께 멈추어서 기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까요.
“현시점에선 AI는 사용자가 입력하지 않으면 출력하지 못해요”
“스스로 나서서 사용자를 도울 수 없죠”
글에서 정의되는 특이점은 이렇습니다. 인공지능이 능동성을 가지는 순간. 그러나 인공지능이, 기술이 능동성을 가진다면 어떻게 되나요? 아니, 애초에 기술이 가지게 되는 능동성은 능동성이 맞나요? 현재도 언어모델이 특정 기업의 거버넌스에 의해 운영되고, 목적에 의해 튜닝되고, 그게 곧 발전의 방향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기때문에 글 안에서도 러닝맨을 향한 해석이 분분한게 아닙니까.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말입니다.
여기서 한번 끊어보겠습니다.
린 샹의 인터뷰까지 읽었을 때 그려지는 이 글의 질문은 두 유형입니다.
표층은 이렇습니다: 러닝맨을 둘러싼 논의, 그를 따라가는 사람들, 거기에서 파생되는 경제적 가치와 마음들은 제멋대로 부여된 것인가?
그 아래의 층은 이렇게 느껴집니다: 현재의 AI 담론은 ‘어떤 (사회적) 입력’이 지속되는 상태인가. 선두, 즉 첨단에 놓인 기술은 어디로 향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따라가는가?
SF가 꾸준히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 말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발전된 형태인가, 인공지능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인터뷰에서 린 샹이 벤파오제와 인파오를 비교하죠. 저는 이 부분에서 “아니다.”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인간을 따라 하지 않고 벤파오제를 따라 해야 오래 달릴 수 있는 게 아닌가. 벤파오제가 이족보행을 하고 인간과 비슷한 체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꼭 인간의 어떤 메커니즘을 모방했다고 볼 수는 없어요.”
“벤파오제는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론 다른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죠.”
“처음부터 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다시 설계해야 했어요.”
인용한 문장들은 러닝맨의 신비함 또는 불가해함을 알리는 장치일 수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인 해석을 가미해 오독의 여지를 열어두었습니다. 인공적인 지능은 정말 인간을 모방한 것인가? 어느 때까지는 예,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에 가깝습니다. 사실 초기 인공지능은 시냅스를 모방해서 생겨났지요. 괜히 인공 신경망이라고 부르는게 아닙니다.
대규모 언어 모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언어를 학습하는 방식처럼 인공지능도 언어의 패턴을 추론하고 학습했죠. 하지만 그 안을 뜯어보면 인공지능의 학습은 의외로 인간과 다릅니다. 형태나 함수는 인간이 설계한 대로 인간과 유사할지 몰라도 그게 작동하는 방식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는 게 제가 아는 인공지능입니다. 같은 세포에서 분화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다 다른 것처럼 인공지능도 기계적 생태계에 적응하며 다른 형태로 운영되고 지속되는 거죠.
이게 왜 중요하냐면, 결국 SF는 인간의 이야기이고 기술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앞부분이 상당히 탄탄하다고 생각한 건 여기까지 사고를 뻗어도 글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에요. 인간과 러닝맨은 다릅니다. ‘달린다’라는 기능은 같지만, 생긴 것도, 반응하는 것도 다르죠. 그렇다면 이걸 조금 비틀어서, 달린다는 것을 ‘생각한다’로 바꾸면 어떨까요. 그렇게 되면 이 글은 단순히 재미있게 달리는 이야기가 아니게 됩니다.
토비 얼라이즈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제가 러닝맨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겠지만 러닝맨이 어디 갈지 어떻게 알겠어요. ‘트래킹 러닝맨’은 러닝맨의 현재 위치를 보여주지 예상 경로를 보여주진 않잖아요” 그러므로 일련의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답을 내리자면, “뭐가 되었든 결국 인간에게 달려있다”라는 겁니다. 관리하는 주체도 사람이고, 쫓아가는 주체도 사람이고.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눈을 뗄 수는 없는 것, 그게 기술이라는 겁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결론이 나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AI 얘기가 나온 이상 자연스럽게 호출되는 담론과 맥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더 읽을 필요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도입부에 ‘질문 세 가지’를 안고 독서를 시작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질문은 두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 카메라맨은 누구일까요.
– 이건 무엇에 대한 기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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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맨을 추적하는 하나의 뷰파인더, 그 너머의 인간
우리는 계속 카메라맨의 시선을 따라왔습니다. 카메라맨은 의사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찍고, 듣고, 관찰하면서도 어떤 말도 편집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글의 다른 특징은 ‘묘사가 없다’라는 거예요. 카메라처럼 시각적인 장치를 쓰면서도 시각 묘사가 없다는 게 오히려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러닝맨을 상상하게 되는 것처럼요.
아비드의 시점부터는 분위기가 급격하게 달라집니다. 영화 같다는 설명이 나오고, 그려지는 이미지 역시 영화 같아요. (이전 인터뷰에서도 행동 묘사가 나오긴 하지만, 이 인터뷰의 이미지가 극적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비드 본인이 이렇게 말하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 부분에서 걷고 달리는 것의 의미가 반전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걷는 건 더 이상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함이나 찾기 위함이 아니에요. 도피이고, 피난이며 목적은 원초적이죠. “살고 싶다”. 그 극적인 상황 연출은 어쩌면 앞부분부터 이어지는 종교 메타포를 닫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비드가 러닝맨을 신이라고 생각한 순간에 동의했으니까요. 다만 아쉬운 건 한가지입니다. 이전까지 달리는 행위의 밝은 면(맹목의 부작용도 나왔지만)을 다루었다면 그것과 조금 다른 결의… 아비드의 입장과 같은 절박함의 부분을 다루었다면 믿음의 반대 면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요.
시점은 남극에 있는 우충우로 넘어갑니다. 장소 배경을 보고 종반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안가는 데가 없더군요. 러닝맨은. 다만 인칭 전환이 급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어체에서 서술로 예고 없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인터뷰가 아닌가 이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 몇 번 넘겼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인터뷰와 같은 형식의 [지역, 이름, 나이] 가 아닌 장 변환을 통해 시점이 달라짐을 알려주시는 방법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우충우가 남극에 온 이유는 이 글의 가장 깊은 면입니다. ‘러닝맨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거죠. 이 모든 인터뷰가 러닝맨의 실체를 알기 위해 이루어지지만 (읽고 나니 그렇게 생각되네요.) 우충우는 이 많은 인터뷰에서도 답을 얻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러닝맨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만 우충우처럼 행동하진 않죠. 그는 ‘팔로워에 둘러싸인 게 아닌 그것만을 마주하고 싶다‘고 ’러닝맨을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를 지우고 독대하고 싶다’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점은, ’자기 자신이 팔로워와 다를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점‘입니다. 본인은 카메라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게 인간적이고, 그 인간적인 면이 러닝맨의 열풍부터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까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죠. 우충우의 입장과 다큐멘터리의 특징을 함께 생각하면 또 다른 결의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이 리뷰의 방향과는 조금 다르므로 넘어가겠습니다.
결국 우충우는 러닝맨을 만나지만, 러닝맨은 결국 그의 속도에 맞춰주지 않습니다. 기술이 우리의 속도에 맞추어 발전하지 않는 것처럼요. 결국 우리는 뒤처지거나, 트래킹 러닝맨 같은 시스템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목격할 수 있겠죠. 글의 끝에서 우충우는 생존하고, 인간에게로 돌아갑니다. 남은 두 질문은 이렇게 회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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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결국 ‘러닝맨’이 무엇인지는 서술되지 않는게 옳은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글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됩니다. 질문을 던지고 끝까지 밀어붙이죠. 독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좋았던 만큼 아주 사소한 아쉬움이 크게 느껴져요. 후반부가 조금만… 조금만 더 구체적이거나 다른 인터뷰가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합니다. 마지막 두 파트의 목적이 종교 메타포를 회수하기 위함이라면 완벽한 구성이지만 독자로서 뭔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요. 그리고 충분히 작품 안에서 러닝맨에 대한 내용이 설명되지 않아도 제시되었는데 그걸 우충우라는 한 사람의 입으로 갈무리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여기까지 적고 나니 무슨 7천 5백 자가 되었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인 사유의 여지를 열어주는 글이라 이렇게 구구절절 적게 되었는데 그걸 제해도 정말 재미있는 글이니 모든 사람이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님께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메인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그걸 둘러싼 사람들의 목소리만으로 서사를 밀어내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아는데 이 글은 그걸 해냅니다. 어떻게 하신 거죠. 이거…. 심지어 묘사 비중도 크지 않은데 이미지가 정말 생생해요. 이런 글을 읽게 해주신 작가님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정말 뭐라고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음 작품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