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의 내용은 작성자의 매우 주관적인 입장에서 쓰는 글이므로 작가가 의도한 바와 완전히 다를 수 있으니 객관적으로 봐 주시고 이 리뷰와 작품 모두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아주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림 속에 그것의 대상의 영혼 일부를 담는 것으로, 어찌보면 예술적인 행동이 살인에 가까운 행위가 되는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서 화가와 앵무새에 관한 일화를 마지막에 제시했습니다. 아주 짧은 이야기여서 그만큼 소재에 대한 신선함이 컸습니다.
우선 그 흥미로운 소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영혼의 일부를 옮겨담는 행위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로 표현되는 것 말입니다. 대상의 영혼의 일부를 떼어놓는 것은 일종의 흑마법이나 저주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름답고 숭고한 행위인 예술이라니요. 이런 상황이라면 아마도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살인마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런 혼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만 작가는 오히려 상황을 절제해서 순수한 화가로서의 삶 중 하나를 말했습니다.
스릴러나 추리물, 혹은 호러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을 담담하고 간결하게 정제하여 제시한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니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닌 제시한 상황과 주제가 중요하겠죠.
그것이 무엇일까요. 화가가 자신이 원하는 일인 그림을 그리는 것과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인 앵무새를 모두 이루기 위해서 앵무새가 말을 이해하고 감정을 표현한다고 인정받을 정도까지 노력합니다. 여기서 끝나면서 생각할 거리가 남는데요.
그럼 앵무새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화가는 앵무새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행위가 앵무새의 영혼의 일부를 앗아가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고도 앵무새의 생명을 줄이는 행동을 한 것은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영원히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서였을까요.
저는 여기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우리 곁에 있으면 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사라지면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래서 화가도 사랑하는 앵무새가 영원히 그림 속에 남아 화가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아름다운 앵무새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서 그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앵무새 본인―본인(本人)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원래 자기 명보다 더 일찍 죽겠죠. 그리고 그만큼 더 일찍 고통받겠죠. 화가는 앵무새가 고통받는 것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 화폭에 담긴 앵무새의 모습에 위안을 받겠죠.
그런 것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앵무새의 아름다움은 날개를 퍼덕이거나, 우리의 말을 따라하는 재롱을 부리거나, 그 목소리로 지저귈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멈춰있는 그림에 담겨버린다면 그런 아름다움이 모조리 사라집니다. 단지 화가의 역량에 따라서 아름다운 앵무새 ‘그림’에 지나지 않겠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야 만족하겠지만 그림을 그린 화가 본인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화가는 그 모습이 아닌 행동에서 앵무새에게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화가의 행동에서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태도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할 때 우리가 그 겉모습에만 사랑에 빠진 건지, 아니면 그 내면과 행동에 사랑에 빠진 건지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겪은 여러 혹은 단 한 번의 사랑 중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진정한 사랑(愛)인지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