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와 추리의 결합에 관하여 공모(감상)

대상작품: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핼리75, 7시간 전, 조회 13

팬들이 기다리며 박박 긁어먹다 못해 그릇조차 혀로 닳게 한 둘빵도 작가님의 장편 신작이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갈망을 넘어 인터넷에서 하나의 밈(meme)이 된 팬들의 바람과 달리 이번 신작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지만, 저로선 그다지 낙심할 게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게 올해 초이니까요. 피마새 한정판을 산 시점으로 생각하자면 겨우 6개월 남짓한 기간이군요. 아직 피마새도 반절밖에 못 읽었는데, 뉴비의 입장에서는 그저 즐길 콘텐츠가 불어난 느낌일 뿐이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한들 둘빵도 작가님의 신작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마새 한정판과 함께 온 팜플렛을 보고 흥미가 북돋았죠. 그야 작가님께서 직접 시체가 글을 쓴다는 보편적인 현상에 관해 기술하신다는데, 그 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월급날 부리나케 달려 사게 된 이번 신작의 시놉시스는 간단히 말해 이러합니다.

옛날 옛적(?) 어느 별세계에 어스탐 경이라는 유명 작가가 살았습니다. 드높은 필력과 달리 인성은 조금아니, 좀 많이 변변찮다, 소리를 듣는 작자였지요.

그래서일까요? 그는 어느 날 소위 속된 말로 칼빵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허술한 범행의 피해자들이 으레 그렇듯 자기 피로 다잉 메세지. 즉, 임사전언을 남기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양반이 주마등을 보더니 영감이 떠오른 걸까요? 범인 이름 석 자가 아닌 갑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얻은 창작욕이 얼마나 극심한지 죽음조차 유예하여 무려 4년간 장정 9권에 달하는 대하소설을 작성했습니다. 뭔가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그냥 의사에게 가라고 탄식하고 싶지만, 일단 작가는 모든 걸(심지어 삶조차) 던져버리고는 오로지 글쓰기에 최적화된 상태가 됐습니다.

게다가 이 소설은 이세계물입니다. 실제 세계와 대칭되는 거울 속의 세계! 현실 인물과 조화롭게 얽혀지는 가상의 인물들! 과연, 위풍당당한 기성 작가. 이세카이물이라는 현대적 관점에서 흥행을 보장하는 보증 수표를 중세 판타지 시점에서 선택한 탁월한 선구안을 보입니다. 이게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미완성본을 읽은 인물이 소설의 신이라고 칭송할 정도지요(물론, 이 의견에 대해서 기존 팬덤이 크게 반발합니다. 내 어스탐 로우의 글은 이런 스타일이 아니야!라고 말이죠.).

어쨌든 간에 그리 그리하여~ 이제는 그 끝에 거의 도달했습니다. 곧 있으면 진범이 밝혀질 겁니다. 체포가 이루어지고, 무고한 인물들은 풀려나며, 수사관은 지독한 일상에서 석방될 겁니다. 모든 것이 장밋빛 미래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 누군가 묻습니다.

저거 언데드 아니냐고요.

응? 언데드? 언데드가 글을 쓴다고? 오오? 그것참, 엿 되기 좋은 소재인걸? 아니, 생각해 보면 어이없잖아. 어스탐 로우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그냥 메모 하나 남기고 쓰면 안 됐던 걸까? 근데 이걸 수사관이든 용의자든 증명할 수 없어 공연히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네? 그렇담 어쩔 수 없지. 모든 신을 모신다는 만신전에다가 물어봐야겠따.

그리고 만신전의 콰이스톨 기사단 답변을 들은 주인공이자 유산 관리자인 더스번 칼파랑 백작과 다소 상대적인 관점에서는 평범한(?) 여성 늑대인간 사란디테가 사건 현장인 ‘오소리 옷장’ 별장으로 향하게 되는데…….

흠,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판타지와 추리 소설을 섞은, 그런 작품입니다. 이전에도 그런 작품이 없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특히 제가 아는 추리물이 BBC 드라마 셜록과 일본 만화인 명탐정 코난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실관계와 논리의 타당성이 중요한 추리 소설과 상상력으로 세계를 채우는 판타지의 결합은 꽤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상당히 성공적입니다. 일반적인 추리 소설이었다면 어떻게 시체가 글을 쓰냐며 독자가 딴지를 걸었겠지요. 하지만 판타지에서는 가능합니다. 판타지만의 강점이지요.

그런 점에서 진행되는 분위기 또한 약간 다릅니다. 본래 추리물이었다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아니면 사건이 일어나는 그 시각 현장에 있었기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긴장감이 흘러겠지요(명탐정 코난이 추리물이 아니라 학살물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작은 이미 사건이 일어난 지 4년이나 흘렀습니다. 사건 당사자든 수사를 하러 온 수사관이든 너무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지요. 응? 시체가 글을 쓴다고?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이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더군요.

사실, 따지고 보면 살인 사건이라기에도 애매모호합니다. 피해자가 먹고 마시지는 않아도 일단 움직이긴 하니까요. 시대적 관점이 중세 정도인 판타지에서 명확한 사망선고 기준을 잡은 것도 아니기에 작중에서도 일단은 살인 사건이 아니라 상해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튼 덕분에 작중에서는 딱히 현장을 탐색하고, 트릭을 추론하지 않습니다. 이미 시간은 지날 대로 지났으며, 사건 현장은 보존을 위해서가 아닌 작품 탈고를 위해서 봉해졌으니까요. 예, 작업실이 되고만 겁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초점은 완결을 앞두고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과 그동안 쓰인 소설 내용들을 등장인물들이 주고받으며 독자 또한 추리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런 설계 때문에 저 또한 어느새 임사전언의 완결을 바라게 된 걸 깨닫자 웃음이 나오더군요. 수사관 스벤터 경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말이죠.

작품이 진행되며 소상해지는 등장인물들의 뒷배경, 그들의 동기와 그로 인한 독자의 헷갈림, 동기 따윈 현실 수사에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나 그 동기라는 것 때문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인간관계의 드라마는 모순적이면서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독자를 멈춰 세우고, 생각하게 만들며, 감정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하니까요.

작품 외적인 부분을 보았을 때, 제가 우선 느낀 건 작가님께서 최신 메타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뭐냐고 물으신다면 가타부타하지 않고 사건을 바로 들이민다는 것이지요.

제가 본 작가님의 이전 소설들, 드래곤 라자(초반만 보다 때려침), 눈마새(완독), 피마새(아직 반만 봄)에서는 사건이 먼저 시작된다기보다 먼저 세계관을 구경하고, 그 세계관에서 뛰쳐나온 인물들을 보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피마새는 조금 정정해야겠군요. 피마새는 상황 파악이 우선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다릅니다. 시작하자마자 작가 죽음! 언데드인지 아닌지 물어봄! 이제 그걸 전하러 가자!’라고 곧바로 사건 중심으로 뛰어드니까요.

확실히, 저는 이런 쪽이 더 좋군요. 제가 인내심이 없어서일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이 제 엉덩이를 몇 시간이고 의자에 붙여놨다는 건 굉장히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신작 이전에 같은 세계관으로 여러 단편이 쓰였기에 가능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계관 또한 독창성보다는 보편성에 가까워 그다지 해석할 필요가 없었고요. 세계관이라고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앞서 말했듯이 보편적인 판타지 세계관입니다. 여러 왕국과 그곳의 왕을 섬기는 봉신들, 개인의 기량이 범인을 뛰어넘고 원리가 불가사의한 마법들, 공주의 육질을 탐하는 용과 그런 것들에게서 공주를 구하는 기사 등등. 우리가 중세 판타지라고 하면 바로 떠올릴만한 그런 세계관이죠.

여기서 아마 이영도 작가가 그런 특색 없는 세계관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보편적이라고 해도 둘빵도 작가님답게 디테일이 살아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작품에서는 귀족은 그냥 귀족이지만, 에소릴의 드래곤 세계관은 현실 봉건제 역사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백작이 자기 영지에서 최고 판사라던가 자작이 본래 백작 꼬봉이라는 점 등에서 말이죠. 그리고 이런 점들이 고작 세계관이 아니라 작품 내적으로 반영된다는 점에서 뉴비인 저로서는 이런 보편적인 세계관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아예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작품 자체가 강력 증거품 1(임사전언)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에 추리 소설은 처음인 저조차 그 향기가 옅다고 느껴졌습니다.

이는 작품 속의 작품, 임사전언을 우리가 직접 읽는 게 아닌 등장인물의 대화에서 유추해야 하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죠. 아마 추리물을 즐겨 읽으시는 분들은 이건 추리물이라기엔 너무 얇아라고 하지 않을까요? , 이 단점은 제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추리물이 익숙하지 않은 만큼 중간중간 의문이 들어서 이 작품이 왜 추리물인가 하고 이유를 찾아야 했으니까요.

두 번째는 작가님 글쓰기 스타일에 관해서인데, 간혹 캐릭터들이 독자는 내버려두고 저만치 미리 앞서가 있거나, 문장이 복잡해져 시간을 들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기존 팬덤이나 저처럼 시간을 들여 곱씹어 읽는 사람들에게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글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유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글들은 각 캐릭터의 입장과 그것에서 사유가 되는 철학을 다루기에 최신 메타를 따라가신다고 해도 휴먼과 강아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요즘 소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인데 어째서 작중 ㅇㅇ과 ㄱㄱ가…… …… 이건 아무래도 스포일러가 될 것 같으니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리뷰라는 건 책을 읽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책을 소개받을 사람도 읽는 거니까요. 확실한 건, 제가 확실한 걸 좋아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제가 이 소설을 싫어할 것 같진 않습니다. 오히려 재밌다는 점에서 눈마새같은 작품을 제치고 작가님 작품 중 최애가 될 것 같습니다. 뭔가 가벼운 것 같은데 심오한 철학적 주제, 명쾌히 그려지는 상황, 그것을 막힘없이 풀어내는 필력까지. 이걸 싫어한다면 제가 뭘 좋아할 수 있을까요?

또한 이 작품은 둘빵도 작가님의 유머도 가득 담고 있습니다. 시체와 드잡이할 것 같은 수사관, 괴성을 지르며 묘기를 선보이는 검술의 달인, 날아다니는 당나귀와 크툴루에서 영향받은 것 같은 종합 해산물 세트까지……. 이렇게 좋은 점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지만 한마디면 충분하군요.

평소대로, 둘빵도 작가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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