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짧은 소설은 시작부터 끝까지 춤 같고 제의 같다. 이 춤은 생과 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춤이며 애도의 춤이고 또한 죽음을 향하는 춤이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도 생명력이 넘친다.
불은 무엇일까. 화자는 무엇에 타오르는 것일까.
‘지아’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차에 치인 것인지, 단장과 어떻게 얽힌 것인지에 대해선 자세한 정보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부유한 한량인 그는 배우들에게 간절한 ‘무대’를 제공했다. 배우들의 꿈을 이용해 그들의 성을 착취했다는 정황을 보았을 때 그는 전형적인 개새끼다. 지아의 죽음은 그에게 받은 상처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왜 화자는 자세한 정황을 설명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죽음을 목전에 둔 초탈한 상태에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파격적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강렬한 복수심에 휩싸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본인이 느끼기엔 그랬다). 그렇다면 화자를 죽음으로 이끈 동력은 무엇인가, 라는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화자는 어떤 불에 타오르는 것일까(상징적으로). 화자는 죽은 친구 지아를 자매처럼 어떤 면에선 연인처럼 사랑하고 있고, 자기 자신과도 어느 정도는 동일시 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녀에게 바치는 제의와 같은 춤, 불에 삼켜지기 위한 춤을 추게 된다. 그 춤을 추기 전엔 이런 의식을 치른다. ‘삼키는 숨에 지아 너의 육신이 남기고 간 연기가 내 속으로 파고 든다. 천천히 내쉬는 숨에 내 가슴팍에 옹이처럼 박혀 있던 것들이 실려 나간다. 들이 마시고, 내쉰다. 너와 나의 혼이 어우러져 숨을 쉬는 것 같다.’ 이처럼 숨을 통해 ‘나’는 그녀와 하나가 된다. 그녀의 뼛가루를 내가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지아는 혈혈단신의 처지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족이 있긴 하지만 가족의 빚마저 짊어지고 있으니,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는 처지다. ‘나’는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형벌을 치르듯 노동을 감당해야 했고, 그런 나에게 춤은 모든 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명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해주는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주관적인 해석이다. 단장은 어쩌면 한 남자라기보단, 무대 뒤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겠다. 무대 위 자유로운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 스스로 매이고 마는 속박, 스스로 걸려든 덫. 나는 지아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미안해. 어쩌면 그 자를 어느 때엔 너보다도 더 사랑했던 것 같아서. 한 순간, 한 찰나에 지나지 않을 욕정에 불과할지라도, 내 욕망에 왜소하기만 햇던 내가 처음으로 한 성취 아닌 성취였거든.’ 화자는 단장이 마땅히 자신과 같은 성향이라 생각했으나, 이후 성향이랄 것이 없는 문란한 사생활이 발각되고부터는 실망한다. 단장에 대한 욕망은 사실 자기 자신의 아니무스(여성에게 잠재된 남성성)에 대한 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단장을 통해 나에게 없던 힘을 얻고, 또 무대를 얻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단장을 통해서 실은 나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실체는 달랐을지언정). 화자를 포함한 배우들은 무대를 얻기 위해 착취를 감내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속박 속으로 들어갔다. 갑갑한 현실 속 숨통을 트이게 하는 무대, 그 무대의 그림자는 어쩌면 더 짙은 것이었다. 죽음을 감수하고 빛에 이끌려 불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나는 불길 앞에서 두려워하면서도 그 불길을 아름답다 여긴다. 그 불길은 자기 안의 예술혼이고 영혼이 강력하게 원하는 생명력일 수 있겠다. 다만 화자는 스스로의 불길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인지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가 죽음의 무도를 추는 동기는 단장에 대한 복수심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항복같아 보이기도 한다. 자기 안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불길 속에서 (상징적으로) 두려움과 환희, 고통과 쾌락은 하나가 된다. 지아는 춤을 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곧 생을 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나이 죽어버리는 청춘들이지만, 그녀들에게서 오히려 강력한 생명력이 느껴진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하다. 어쩌면 그녀들은 지나치게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과 열정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나’의 마지막 춤 장면에서는, 영화 블랙스완의 (아무래도 마지막일 것으로 보이는) 발레 장면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정화시키는 불길에 자신을 내던지는 예술가의 광기.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샤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모든 것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초탈한 듯한 ‘나’, 실제의 불길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 그 어떠한 무게도 짊어지지 않고 그저 춤을 춘다.’ 그런 방식으로 이 삶에서 춤을 추듯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을까. 이러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쩌면 끔찍한 장면이라 할 수도 있는 엔딩에서 초월과 생에 대한 환희가 엿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세간의 성공과는 무관한 진정한 예술가는 두 종류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정수, 예술혼을 만나 육체까지 소멸시키느냐(요절한 천재들을 비롯, 천재는 아니더라도 삶을 감당치 못했던 젊은이들도 해당될 것이다), 에고만 소멸시켜면서 불꽃 그 자체가 되느냐. 나방이 불을 보고 달려들어 유리창에 부딪히기를 거듭하다가 아침에 친구들에게 돌아가 말한다. “어젯밤 정말 굉장한 것을 보았다네.” 그러자 친구들이 말한다. “그런 건 안보는 게 좋아.” 하지만 나방은 이미 그 불꽃에 사로잡혔다. 나방은 다음날 다시 그 곳에 가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고 마침내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하나가 된다. 그는 세상을 밝히는 불꽃이 된다. ⁃ <블리스> 조셉 캠벨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를 유려하게 담아낸 솜씨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속도감 있게 읽히면서도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리드미컬한 문체가 매력적이다. 모처럼 인상깊은 초단편을 만나 반가운 마음! 다음 소설도 기대하겠습니다,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