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춤을 글로 쓴 게 아니라, 글로 춤을 춘다.
독자는 소설의 시작에서, 화자와 동일한 위치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게 된다. 처음에 “혀로 입천장을 톡, 토도독, 톡, 톡 두드린다”라는 부분은 일견, 화자의 버릇(또는 죽은 지아의 버릇)처럼 보일 수 있다. 또는 앙 뿌앙뜨 상태로 빠르게 걸어가는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공연이 시작되며 나오는 음악의 도입부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다음에 “지아가 나타나길 기다린다”에서 이 리듬은 동시에, 지아라는, 이미 죽은 자를 소리로 불러내는 주술처럼 작동한다는 걸 알게 된다. 주술사 또는 무속인은 반복적인 박자를 통해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죽은 자와 소통을 하게 된다. 때문에 혀로 입천장을 두드리는 장면은 무속인이 북을 두드리는 것과 동일시 된다.
다음으로 핀조명이 떨어진다. 이 조명은 무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장치이며 동시에, ‘심문장’의 조명이다. 화자는 관객석에 앉아있지만 심문장이라는 무대에 불려나온 상태다. 지아는 화자를 원망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저 죽는 순간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즐겁게’ 춤을 출 뿐이다. 그러나 핀조명이 떨어지는 것은 화자가 자기자신을 무대라는 ‘심문장’에 밀어넣고 ‘넌 왜 그랬어’ 라는 (본문에 나오지 않는) 질문-아마도 스스로와 지아에게 던지는-에 죄책감, 미안함, 원망, 후회 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척추 분쇄 골절, 경추 골절, 척수 손상, 다발성 장기 손상, 과다 출현이라는 딱딱한 의학용어에 이어지는 ‘입 속을 파고 들었다’, ‘아로새겨진’ ‘먹먹하게’ 라는 말 그대로 (의학용어와 대조적인) 문학적인 표현도 흥미롭게 읽혔다. ‘핥고 또 핥았다’ 라는 반복을 나타내는 마무리는 화자의 강박적인 애도를 나타낸다.
중반부에서야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된 사건이 나온다. 단장의 성추문 사건, 그리고 이해하지 못할 수사 종결, 거기에 직접 관련된 남은 화자와 죽은 지아. 이게 핵심 사건이지만 이제 화자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 부분이 환상 속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서술인 것도 인상적이다.
특히 이 소설의 주목할 점은 감정을 직접 명명하지 않고 신체적 감각이나 움직임으로만 표현한다는 것이다. ‘가슴팍이 조여온다. 목이 갑갑하다. 혀뿌리가 시큰하다.’… 작가는 슬픔을 ‘슬프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그 감정을 신체의 구체적인 반응으로 변환함으로써, 독자는 화자의 고통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실제로도, 극한의 감정은 신체에 물리적인 데미지를 주니까.
‘겅중 뛰어오르다’, ‘데구르르 떨어지다’, ‘자근자근 밟히다’ 같은 것도, 추상적 감정 대신 구체적인 움직임을 제시한다. 그로 인해 독자는 화자가 지아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거기에서 화자가 받은 충격도 ‘체감’으로써 공유하게 된다. 때문에 작가가 노린 것은 독자들이 화자의 감정을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독자들의 피부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어서 실제로 느끼게 하려던 게 아닌가 싶다.
작가는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짧고 아무 형용사도 붙지 않은 문장들을 사용해, 화자의 환상이 사라지는 순간의 각성을 문체적으로 구현한다. 이는 앞서 흐르듯 이어지던 긴 문장들과 강렬히 대조되며, 문장의 길이가 서사의 감정 온도를 직접적으로 조절한다. 마치 외스텐의 <꿈꾸다 깨어난 인형>에서, 인형이 꿈을 꿀 때는 느리고 잔잔하다가, 깨어날 때 짧고 강렬한 불협화음이 튀어나오듯이.
깨어난 현실은 다 쓰러져가는 폐쇄된 극장일 뿐이다. 정작 포스터에서 의지가 느껴지던 지아는 죽고, 그 의지가 없었던 화자는 현실에 순응해 ‘허청거리면서도'(이 표현이 좀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하도 일상적으로 듣는 말이라 그런지 글에 쓸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있다는 대조와 함께. 그 순간 오는 광고문자조차도 화자에게 뼈아픈 현실만 상기시킨다.
마지막 불길의 장면에서 표현은 극적으로 응축된다. 전통적으로 불이라는 상징은 파멸이지만, 동시에 정화와 해방도 상징한다. “나는 기꺼이 불의 아가리 속으로 내 온 몸을 집어 넣고 처음이자 마지막, 오직 나와 너만을 위한 공연을 벌이겠다.” 이 문장은 비극의 절정이자 화자의 자기 해소의 선언이다. 화자는 지아에 대한 속죄와 ‘망자를 위한 고별’을 위한 ‘제의’의 춤을, 자기 몸을 제물 삼아 불에 태워버리고 이 모든 것을 ‘정화’하고 해방된다.
그래서, 왜 제목이 [불타오르네]인지는 알겠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좀 많이 아쉬움이 남는 제목이다. 이 소설에는 딱 맞는 제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지금 딱 떨어지는 적당한 제목이 떠오르지도 않는 게 사실이다. 글쎄, 식상하더라도 [불의 춤]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