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서점 사이트는 종류가 달라지긴 하지만, 항상 만화책을 1권 내지 2~3권 정도 무료로 제공하곤 합니다. 옛날에야 이게 웬 떡이람, 하고 좋아서 보곤 했지만, 그렇게 초반 부분을 보고 산 전권 세트가 몇 개쯤 있는 지금은 압니다. 이게 30일 체험판과 같은 거라고요. 공짜라고 좋다고 맛을 보고 나면 그대로 털고 떠날 수 없어서, 결국 그 다음을 위해 지갑을 열게 하는 거죠.
우울한 생각이 기력을 많이 소모하는 행위라는 걸 아셨나요? 우울함이 익숙한 저는 그게 중력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밝게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게 더 힘든 일인 줄만 알았습니다. 최근에 본 글에서 이러니 우울한 사람들이 기력이 없어서 혼자 지내게 되고, 우울한 생각을 반복하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하죠. 그리고 현대의 과소비는 현대인의 시간 부족 탓도 있지만, 기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걸 얻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봤습니다.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나라, 좋다고 싫다고도 하기 어렵고 밤이면 끔찍하게 고요해지는 낡은 골목길에서 모호하게 흐려지듯 사는 주인공은, 그렇게 길거리 좌판에서 이름도 모를 과일 하나를 덤으로 받습니다.
단 한 번 맛본 경이를 위해 분주하게 조사하고 다니고, 끝내 알아내지 못해서 혹시 씨앗이 죽어 버릴까 조마조마하면서 싹을 틔우고, 그게 자라는 모습을 보며 두근거린 끝에 사랑에 빠지고 마는 주인공의 모습에는 ‘반려 식물’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동물이랑 다르게 한없이 정적으로만 보이는 이 생물은, 사실 하루에도 이리저리 볕을 따라 움직이고 또 쉼 없이 자라고 있거든요. 그래서 ‘순’이라는 이름을 공유하게 된 식물이 주인공의 닻이 되어 줄 줄 알았습니다. 실수였어도 키스할 만큼 가까웠던 사람이 떠난 지금, 여전히 내 자리라곤 보잘것없기만 한 이 땅에 한 가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요.
원영이 다시 귀국을 제안했을 때는 겹경사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래도 이름 모를 식물에 정 주면서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 있으니 좋은 일도 생긴다고요. 검역은, 그러고 보니 제목이었지, 정도의 감각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죠. 요즘 좋은 일만 있었는걸요. 그러나 도저히 함께 갈 방법이 없다는 걸 원영에게 알리고 매서운 질책을 들었을 때는 높은 절벽에서 떨어진 것처럼 슬펐습니다. 역시 기뻐하면 할수록 나중에 더 슬퍼진다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공존할 수 없을 때는 그냥 다 관두고만 싶어지는데, 마침 딱 주인공도 그래 줘서 마음이 편안했네요. 뇌는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걸 이럴 때마다 실감하곤 합니다.
여기가 바닥인 줄 알았는데 또 바닥이 있을 때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와…. 모든 일이 한 편 안에 다 일어나는 게 단편 소설이라지만, 매번 이렇게 추락할 때마다 절로 놀라고 맙니다. 원영도 없고, 직장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짐작도 가지 않는 상황에서 유일한 빛이었던 순이, 영원한 고통을 예언하며 나를 잡아먹는다니요. 대체 인생을 어디서부터 잘못 살았는가 절로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후회한다.’는 현재형으로 끝나는 문구에서 작품도 끝날까 봐 가슴을 졸였습니다. 여기서 끝났으면 아마 리뷰의 시작 부분도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하지만 원영이 나타났죠! 행복한 노후는 단 한 사람의 가까운 사람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말처럼, 원영이 문을 부술듯이 두드렸을 때는 그래도 헛살진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했습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정말 기쁘고요. 순도 원영에게 겁먹은 것처럼 시들시들해졌을 땐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세등등해졌죠. 이제 안녕이다, 이 못된 식물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그 과일을 주인공이 다시 손에 쥐기까진 그랬습니다. 과연 한국에 돌아가도 괜찮은 게 맞을까요? 이런 게 유행한다는 그곳을 과연 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설마 한 편에 뒤통수를 두 번 맞을 줄 몰라서 더 얼얼했던 마무리가 인상 깊었습니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읽는 저는, 영원히 과일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까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