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마녀학 입문이라는 소설은 가상의 세계에 대한 설정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다. 애초에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하겠지만 나는 이 작품의 특이점을 뽑는다면 그럴 듯한 설정과 그럴 듯 하지 않은 설정의 사이를 오가 그럴 듯한 세계를 쓰는 것을 뽑겠다. 이 복잡한 문장은 아래로 풀어 쓸 것이다.
이 작가는 특정 소재, 특히 음식이나 식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필력이 올라간다(혹은 필자가 단순히 식탐이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작가가 식탐이 많아서 일수도 있으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음식이란 기본적으로 생존과 직결된 사안이며, 식문화란 그런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혹은 필요 했거나 할 수도 있는 것들이 남은 흔적기관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식문화에 대한 파트는 이 작가가 그렇게 신경 쓰는 가상 세계의 설정을 가장 자연스럽게 훔쳐볼 수 있는 방법이다.
이제는 첫 문단에서 언급한 그럴듯한 설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에 대한 설명은 존재한다. 어디에나 있는 흔한 빵이라도 가상의 세계에서는 단지 ‘흔한 빵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라는 설명 이외에도 이어진 문화가, 더 피워갈 문화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설정을 너무나도 자세하게, 빵껍질과 그 속을, 빵의 앞과 뒤를, 위와 아래를 전부 구분하고 이름을 짓는다면 그야말로 작위적이라 할 수 있다. 설정을 위한 설정만이 도배 되어 가상 세계가 존재한다고 느껴지기 보다는 설정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현대 마녀학 입문은 적어도 식문화에 대해서는 설정이 세계보다 우선하는 것이 아닌 세계가 우선시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정 조리법에 대해서는 하르스티즈라는 불을 사용한 요리에서 다른 후르딜라하르스티즈, 스피타하르스티즈등으로 유사한 시작에서 파생되는 설정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콩을 삶은 안코 소스, 해당 소스에 대한 설정은 “요리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소스의 총칭을 칭하는 명칭도 없다.”라고 소스에 대한 장황하고 재미없는 해설이 아닌 있을 법한 공백을 넣어 설정이 더욱 실감나게 서술한다. 이것은 단순히 있을 때는 넣고, 없어도 되는 것은 빼는 간단한 일로 느껴질 수도 있으나, 설정을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참고 설정보다 자신 속의 추상적인 미적기준(필자는 이것을 현실과 그 조금 옆의 세상을 나누는 경계선이라 생각한다. 혹은 간단하게 ‘가상 세계’라고 할 수 있다.)을 우선하여 분명 우리의 시간은 설정과 세계지만 세계 이후 설정이 존재한다는 감상을 느끼게 한다. 그 적당한 공백, 또다른 예로는 마녀는 맥주를 음료수처럼 마시지만, 책상 앞에서는 금지.라고만 서술한다. 그 관습을 어기면 안되는 이유,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생략한다. 독자에게 “어쩌면 단순히 책상이 더러워져서 일지도 몰라. “라며 독자의 내부에 있는 ‘현실적’이라는 감각을 끌고와 원하는 방식대로 설정을 먹도록 돕는다. 괜히 긴 16가지의 식사예절도 필자는 고급 상류층 문화에 존재하는 실용성 없는 관습적 목록, 혹은 당연하게 지켜져야 하는 일상적인 매너, 둘 중에서 내게 더욱 ‘현실적'(납득이 가는)것으로 읽었다.
결국 해당 작품은 뭐라 말을 늘어놓긴 했지만 의도적인 공백으로 인하여 상당한 양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해당 세계가 누군가가 설정을 짜 맞춘 그림이나 텅 빈 캔버스가 아닌 덩쿨식물의 줄기가 자연스래 얽혀 벽의 형상을 이룬 캔버스로 느껴진다. 작가가 상상을 하라고 준 공백마저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작가의 공백에 대한 의도와 미적 감각은 해당 편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대한 것이다.
재료를 기존 스튜에 넣고 끓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허나 동시에 따듯한 것이 자연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면 식은 음식도 가열할 이유가 없다면 자연스러운 것이란 설정이니까.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자연’이라는 키워드를 주고 그 키워드에 너무 엇나가지 않는 범위에서 작가는 씨를 뿌린다. 그리고 그 씨앗이 자라서 유사 캔버스로 변하면,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자, 상상해봐.”
작가는 분명 자연스러운 세계를 상상했고 그 자연스러운 세계에 우리가 자연스럽게 상상하도록 유도하였다.
허나 작은 불만을 품자면 작가는 악질이다. 읽다 보면 작가의 ‘자연스러움’은 분명히 경계 혹은 형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강요하기 보다는 마치 집의 기반과 같다. 상상을 하고자 한다면 이 위에서 하는 것이 편하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라며. 그렇게 은근 슬쩍 옆구리를 찔러오기에 악질이다. 독자에게 상상을 펼치게 해주었지만, 어디로든 가라!라고 하여 눈을 감고 뛰었는데 결국 작가가 준비한 ‘자연스러움’으로 돌아오게 되는 굴욕을 동시에 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현대 마녀학 입문은 논문의 탈을 쓴 자연스러운 설정, 세계에 대한 이념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념을 타파하고자 그놈의 자연이 뭔지 알고 싶은 사람들, 뭔지 모를 이념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가상의 세계를 부정하고 싶은 분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친구가 비록 좋은 말만 한다거나 쓸모있는 친구는 아닐지라도 분명히 생각하게 되고, 옆에 있게 되는 친구일 것이다.
-2025년 6월 23일 새벽
작가 때문에 땅콩버터&딸기잼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