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민담에 대해서도 종종 이야기한다. 톨킨 이후의 정형화된 ‘가상 세계 판타지(혹은 우리 나라에서는 정통 판타지가 부르는 그것)’가 아니라, 좀 더 원초적인 것들을 이야기할 때, 이를테면 예이츠의 <켈트의 여명>이나 워싱턴 어빙의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같은 것.
전자는 이야기 채록집이고, 후자는 엄연한 단편 소설이지만 둘을 비슷한 선상에 놓아도 될 것이다. 워싱턴 어빙이 단편은 유럽의 설화를 미국 이주민들의 세계에 불어넣기는 구조로 되어 있었으니까.
이러한 이야기들은 민족적인 신비와 경이감을 자아낸다. 믿기 힘든 이야기, 그러나 할머니 대대로 내려왔고 왠지 있을 법도 한. 그래서 무섭고 기이한. 이런 경이감과 경이감의 경계에서 환상은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시골에 살고 있지 않고, 민족이라는 말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환상은 사라졌는가? 천만에. 어떤 낭만이 지워진 채 민낯을 드러냈을 뿐,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프카의 <변신>이 그러한 작품이었다.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어버린 노동자. <변신>은 엄연히 단편 소설이지만, ‘작가’가 뒤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또 모르는 일이다. 현대 사회의 기담으로 남았을지도.
요컨대 환상은 현대 사회에도 형태를 바꿔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서 환상이 태어나는가.
과거에 역사적으로 채록된 자료집은 그저 박제된 채 남아있을 뿐이다. 박제된 자료를 그대로 소설에 쓸 수도 있겠으나, 꽤나 전투적이고 실전적인 작가라면 그 박제된 자료를 그대로 활용하지는 않으리라.
더 바깥으로 나아간 작가들은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또한 무에서 뭔가를 빚어내는 건 아니다. 그들이 포착하는 재료들은 조금 더 실전적인 감각과 이미지들이다. 밤에 산을 타고 흐르는 희무레한 것들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슬렌더맨’이 되고, ‘팔척귀신’이 되고, ‘장산범’이 된다.
그 점에서 작가가 쓴 세 편의 단편들은 조금 더 바깥으로 나아간 경우다. <이웃사촌>은 층간 소음에서, <아이스크림 트럭>은 심야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희망세탁소>는 세탁소에서 끄집어낸 환상이다.
작가는 이 세 편의 단편에서 강렬한 이미지(<이웃사촌>의 경우에서는 청각이겠다)를 활용한다. 도저히 문을 열 시간이 아닌데 장사를 하는 아이스크림 트럭, 기이한 현수막을 내건 세탁소. 강렬한 이미지와 마술적인 묘사로 독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리고 이미지의 뒷면, 아무도 누구도 표정을 짓지 않는 스크린의 뒷면에 내동댕이친다.
눈길을 끄는 이미지와, 그 뒷면 사이의 경계 지대. 작가는 그 곳에서부터 환상을 쌓아올린다. 그리고 독자를 홀려 그 환상에 내동댕이친다. 그 기묘한 리미널(Liminal)함이 느껴지는 단편들을 읽어보는 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