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인지 아시오? 악마를 곁에 둔지 모르는 거라오. ]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 자신만큼이나 도움이 필요하고 절박한 사람의 등을 후려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 슬펐다. 냉각수 결핍은 모든 상황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만든다. 냉각수가 있어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 하디의 열심과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부족했고 처음부터 한계가 명백했다.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내가 처음부터 악마였다고? 웃기지 마. 당신이 나를 악마로 만든 거야. ]
이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하디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디를 녹등가로 향하게 만든 근본적 원인 역시 노인이 아니다. 하디를 악마로 돌변하게 만든 건 그가 가지고 있던 미열 탓이었다. 불합리한 이 시대는 돈 주고 냉각수를 살 수 없는 형편에 처한 사람들이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다. 문제는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노력해도 해결은커녕 뱀이 자기 꼬리를 잡아먹게 되는 모양새가 된다. 문제가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단순하다. 목숨줄과 다름없는 냉각수가 동등하게 공급되어야 기본적인 최소한의 생존권을 누릴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안다. 공평하게 돌아갈 냉각수는 없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있는 냉각수의 양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가격은 그만큼 비싸진다. 돈이 없는 사람이 냉각수를 교체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자꾸만 낮아져 간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생존할 수 있는 굴레에서 쫓겨난다. 충분한 돈이 있는 사람들만 냉각수를 구할 수 있다. <미열>의 이야기는 우리의 사회 시스템이 빠르게 굴러가고 있는 방향과 닮아있다.
이걸 선택이라고 표현하긴 거부감이 들지만, 마지막까지 내몰린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죽거나 빼앗거나. 적사각 작가님의 작품에는 사람이 생존만을 위해 살면 안 된다는 경고가 자주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열>은 생존만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내몰린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하 세계로 그려진 녹등가는 가난하고 없는 사람이 내몰린 마지막 지역이었다. 더는 갈 곳 없고 기댈 곳도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갔지만, 텅텅 비어 있는 빈집들만 남아 있다. 냉각수를 구하지 못해서 죽거나 어렵게 구해서 가지고 있던 냉각수를 수렵 당해 빼앗기고 죽었을 것이다.
녹등가 노인은 혼자 내버려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의문이 든다. 노인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의 태도는 굉장히 이중적이고 복잡하다. 빼앗기 위한 함정이라는 것도 알면서 하디를 자신에게로 유인하는 사람 같았다. 하디가 노인을 죽이고 냉각수를 빼앗지 않았다면 노인이 하디를 죽이지 않았을까? 시험에 빠뜨려도 빠지지 않는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희망으로 사람을 시험해 보고 싶었거나 내가 악마였고 다른 사람도 악마였듯이 아직 인간으로 남아있는 너도 별수 없는 악마라고, 뼈아픈 깨달음을 주고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미열>의 결말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하디가 세이에게 ‘그 일’을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은 이들의 가깝고 먼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어쨌든 좋게 해결된 것 같으면서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숙제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생존만을 위해 그저 살아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고 싶어서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는 하디의 고민은 <미열>의 세계관 안에서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바보 같고 쓸데없다는 생각도 든다. 살려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고 그게 아니라면 살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하디는 정말 비효율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걸까?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 끝까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