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또다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전 종말이라는 소재를 나름 좋아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인류라는 종과 그들이 이뤄낸 사회, 업적, 기술 등등이 무너지는 걸 보며 몰입하는 건, 우리가 어릴 시적 장난감으로 지은 성이나 개미집을 무너뜨리며 느꼈던 원초적인 쾌감의 연장선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색다르면서도 신선한, 하지만 좀 아쉬운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의원들에 의한 투표 결과, 일주일 후 종말을 맞이하게 된 인류, 그리고 종말을 선언한 인공지능을 찾아 비행기를 타고 바티칸으로 향하는 주인공… 어떻게 보면 클리셰적인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은 예상과는 다르게 꽤 신선했습니다.
종말이 눈앞에 닥친 혼란스러운 사회와 ,평온을 유지하며 자신이 읽던 이야기의 결말을 듣고자 하는 주인공은 네빌 슈트의 ‘해변에서’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종말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건축 회사에 출근해 건물 디자인을 하거나 내년 봄에 자랄 눈풀꽃을 화단에 심습니다. 심지어 종말이 구체적으로 선포된 이후에도 주인공인 혜민은 다른 작품들처럼 인류의 운명을 건 최후의 투쟁을 벌이는 대신, 읽지 못한 소설의 뒷이야기를 알고 싶다는 이유로 종말을 선언한 인공지능 의원을 찾아갑니다.
마치 일상물의 주인공 같은 혜민의 이런 차분하고 담담한 행동과 그에 대비되는 거대한 멸망이 다가온 세계는, 색다른 대비를 이루어 이야기 전체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 이야기가 중간에 끊기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독자이기에 주인공의 행동에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 읽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종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던 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안락사센터가 설치되었다고는 하나, 그곳으로 어떻게 수많은 탄소기반 인간들을 밀어넣을 것이며, 인간들은 어째서 저항이 불가능한지가 나오지 않은 점은 감점 요소였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해변에서’처럼 왜 이 종말이 절대로 피할 수 없는지 조금 더 납득 가능한 설명을 해 주었다면,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더욱 아쉬움이 큽니다. 또한 단순히 변이종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전 인류 몰살을 선언한 의원 역시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차라리 환경오염 같은 클리셰적이라도 조금 더 납득 가능한 이유를 말해 줬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쉬운 면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끝나고 찡그림이 아닌 미소가 남는 이야기였습니다.
인류는 멸망했지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겠죠. 저도 언젠가 피할 수 없는 끝이 오기 전까지,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읽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