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감상

대상작품: 당신은 나의 동반자 (작가: 사피엔스, 작품정보)
리뷰어: JIMOO, 2일전, 조회 12

[ 우린 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어긋났을까. 그런 우리는 처음에 서로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

사람은 약하다. 상처 입으면 회복되지 않기도 하고 흉이 남는다. 병들거나 언젠가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계는 영원할 수 없다. 모르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안타까운 후회를 남긴다.

잃어버리면 되돌릴 수 없다. 대체할 수 있다면 이별하거나 사별했다고 슬퍼할 이유가 있을까? 무생물이라면 어떨까? 내가 오랜 시간 보며 아끼던 책이 없어지거나 훼손되어서 새 책을 샀을 때 내가 남겼던 메모들과 흔적까지 고스란히 복원할 수 있다면? 속상함을 금방 떨쳐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절판되었고 중고로도 살 수가 없다면? 그, 그건 절대 회복 불가의 기억으로 뼈아프고 사무치게 남을 것이다.

다른 생명체를 예로 들어보겠다. 기르던 개가 죽었을 때 똑같이 생긴 개를 데려와 기르더라도 닮은 다른 개일 뿐이지, 나와 시간을 보냈던 그 개는 아니다. 인간을 로봇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어떨까? 경험이 아닌 상상으로 생각하기엔 진짜와 가짜의 차이점을 금방 구별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하다면 흔들릴 것 같다. 그렇게라도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모습과 기억, 취향까지 생전의 지오와 가깝게 복원해 놓은 ‘지오’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상적인 맞춤형 ‘남선’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아서, 완벽에 가까운 이상형을 만나도 결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안 맞는 점은 생길 수밖에 없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불완전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지오’와 ‘남선’이 아니라 남선이어야만 할까?

[ 그래. 이런 갈팡질팡하는 마음도 써보자. 그게 인간이다. ]

이 말이 되게 좋았다. 남선은 주인공을 그렇게 만드는 사람 같다. 불명확함으로 밀어 넣어 불안하게 만들지만 그 사람과만 주고  받을 수 있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들로 인해 마음이 확 기울어지게 된다. 반면 ‘지오’나 ‘남선’에게 느끼는 거리낌은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러면 안 된다는 윤리적 판단과 그녀가 원하는 모습을 뚝딱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 아니었을지. 다른 누군가를 끊임없이 베껴야만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가짜를 벗어날 수 없는 ‘지오’의 한계점은 명확해 보인다.

남선과 그녀는 서로를 다 모른다. 알고 싶어서 노력해도 때론 이렇게 엉망이 된다.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상호작용 속에서 조금씩 단단하게 쌓아가는 신뢰와 애정이었다. 금방 내 머릿속 정보를 빼내는 ‘지오’를 보며 마음을 도둑에게 강탈당하는 기분이 들었을 것 같았다. ‘지오’는 절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노력해서 그녀를 알아갈 수 없다. 링크의 인간형 모습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떠나가면 죽을 거라며 협박도 하고 괴로워하는 ‘척’을 한다. 마음에서 온 판단이 아니라 TMT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어서 시스템의 이득에 관계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 형상일 뿐, 도구 이상이 될 수 없다.

[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란 영상의 선명도와 볼륨을 최대한 낮추는 것, 그리고 도를 닦는 스님처럼 내 안으로 깊숙이 기어들어가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물론 그 일은 맘대로 되지가 않는다. ]

[ 발악해봤자 피곤하기만 하더라. 떠먹여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속이 편해. ]

[ 링크, 넌 날 떠나지 마. ]

<당신은 나의 동반자>가 그리는 시대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발달된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현실 문제들이 반영된 덕분에 먼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링크가 보여주는 영상과 목소리와 광고들에 시달리고,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난데없이 쏟아지는 sns 속의 광고 소음이 너무 당연해져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가치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핸드폰(인터넷 연결이 되는 기기들)을 잠시 눈앞에서 치워두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다른 것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사람이 되어간다.

많은 것들이 과거에 비해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다.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편리는 누군가 대신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만든다.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선택 장애가 온다. 자유로워지라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시대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말 그럴까? 대중을 현혹하는 상술에 온종일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각심이 든다.

문명인을 무인도에 던져놓으면 적응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필요한 것에 비해, 없이도 잘 살아왔던 시대의 사람들도 편리함에는 너무나 쉽고 빠르게 적응한다. 유튜브 없이는 못 살 것처럼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출퇴근 대중교통 안에서 핸드폰만 쳐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풍경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그 행동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기거나, 책 읽는 사람들을 과시형 독서라면서 이상하게 몰아가고 독특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엘리베이터가 있어도 계단을 굳이 만드는 이유가 있다. 전기 스위치를 켜면 되는데 양초를 켜고 살아갈 필요는 없지만 예기치 못한 정전이 되면 준비해 둔 양초를 꺼내듯이.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라 믿어버리기보다는 예기치 못한 불편함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 잘 훈련된 근육이 현대인에게는 필요한 것 같다.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 눈은 땅을 향하고 있다. 사실 그의 시선은 무엇도 향하고 있지 않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것이다. ]

[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관계에서 균형이 지나치게 깨져 있음을 직시한다. 자신의 삶을 좀 더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

눈앞의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기반으로 어떤 말을 하는지 그때그때 달라지는 마음 상황과 대화를 통해 깊이 알아가려고 하기보다는, ‘링크에서 영상이나 글로 봤는데, 그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니 생각도 이럴 것이다’ 맹신해 버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각자만의 생각으로 나만을 위한 ‘지오’를 만들어 가듯이,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을 판단할 때조차도 우리만의 단편적인 정보로 그 사람의 모습을 실제와는 너무 다르게 그려나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링크를 잘 사용하는 것은 유용하다. 판단할 수 없을 때,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타인의 지혜를 빌릴 수 있다면 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겠지만 온전히 의존하는 것은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전 세계 사람들과의 연결이 쉽고 빨라지고 있는데 고립감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양하게 느낄 수도 있는 나와 너의 판단 위에 군림한 링크가 어떤 의도로 말을 건네고 영향력을 끼치는지도 모른 채 휩쓸려 간다면, 최종 목적지는 어디에 도달하게 될까?

<당신은 나의 동반자>는 링크의 시대에 좁은 세상에만 갇혀 있지 말고 직접 만나러 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와닿았다. 과거 흉터조차 매끈하게 없앨 수 있고 훔쳐 온 타인들의 죽은 기억으로 짜집기 되어 만들어진 가짜가 아니라, 그런 과거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때론 망가질 수 있고 무엇으로도 복원해 낼 수 없는 진짜가 소중하다고. 소중한 사람의 두 눈을 쳐다보고, 귀 기울여 듣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시간에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그러니 교훈을 얻었다면 핸드폰 좀 그만 쳐다보자. 될까? 시간 줄이는 것에 도전해 봐야겠다.

마지막이 남선에게 온 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서 조금 아쉬웠다. 이미 충분히 좋은 결말이라서 사족이 되어버릴 수 있지만 뒷 이야기를 상상해 보았다. 남선을 만나러 간 주인공은 두 팔을 벌리고 반기는 남선을 보고 뛰어가려다가 멈칫하고 만다. 이상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남선은 왜 그러냐 묻는다. 그녀는 몇 가지 질문으로 남선이 ‘남선’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며 환한 얼굴로 뛰어간다. 여기까지 상상해 봤더니, 얘네 제발 만나게 해주세요 하는 여운이 남는 작가님의 지금의 결말(이메일 엔딩)이 역시 더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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