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오답노트가 아닙니다. 일개 독자의 주관적 감상에 불과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 ‘SF’라는 장르에 대해 거리감을 두고 있는 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SF’라는 장르 자체가 사람에게 거리감을 두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죠. 그 거리감은 이 장르에서 다루는 ‘과학’이라는 주제에서 오는 난해함도 있겠지만, 해당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전문성’이 전제되는 것도 한 몫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자칭 ‘SF 매니아’들은 해당 분야에 대해 더 까다롭게 접근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환상성으로 치부하며 넘어갈 수 있을 법한 문제들에도 ‘고증’이라는 기준을 제시하며 재단하려드는 풍경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죠. 그만큼 이 장르는 관객을 가리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해당 주제에 공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들춰보는 것조차 꺼려지는 논문 한 편을 읽는 감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태초에 빛이 있었다.>라는 작품은 무척 인상이 좋았습니다. 핵전쟁과 지구 종말로 인해 인류가 우주로 진출했다는 거대한 배경설정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고 익숙한 이야기를 담아내며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솜씨가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인물들과 고찰이 필요한 사건들을 제시하며, 인물들이 다양하게 엮이는 정치극에 가까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몰입감이 적지 않았습니다. 작가님의 필력 또한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문에 조심스러운 감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제 부족한 시선으로 재단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 제 부족한 지식으로 이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는지도 확신이 없습니다. 후술할 내용은 이 작품의 흠집을 찾는 과정이 아닌, 작품을 덮고 독자로서 느꼈던 아쉬움을 담았다고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점은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작품입니다. 그저 제 시선에서 보였던 아쉬움을 세 가지만 정리해보겠습니다.
1) 이름이 없는 등장인물들
등장인물에게 ‘이름’이 없는 서술방식은 낯설지 않습니다. 떠오르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성씨를 호칭으로 대신한다. ex. 김씨, 최씨, 박씨…….
– 직업과 나이 등 신분을 알 수 있는 호칭으로 대신한다. ex. 소년, 부장, 총리
– 이름 자체가 생략되는 것을 가정한다. ex. A씨, B양
중요한 것은 ‘이름을 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작가의 의도라는 점입니다. 이름 짓기 귀찮다는 민망한 이유가 아니라면, 분명 이름이 없는 데는 의도가 깔려 있기 마련입니다.
이 작품 또한 의도적으로 이름이 생략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에게 특별한 직책(대통령, 총리)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성씨 하나로 불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실 생략된 것이 아니라, 이름 자체를 성씨 하나로 호칭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법합니다.
사실 소설에서 ‘이름’이 없다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았습니다. 오로지 글자를 받아들이고 상상으로 색을 입히는 소설로서는,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가령 ‘양미영’ 같은 이름으로 단번에 여자라는 성별을 알려주며 첫인상을 줄 수 있는 인물이, 굳이 ‘양’이라는 성씨만을 제공하며 그 첫인상에 한 번 거리감을 두게 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인물들이 말투와 인물상에서 개성을 잡을 수 있다면 이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작가님의 담담한 문체 특성상, 사용하는 언어에서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뿐, 남자와 여자 같은 기본적인 목소리와 말투가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간혹 전체적으로 많은 등장인물들이 목소리를 공유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작중에 너무 많은 인물들이 이런 호칭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실제로 작중의 비중이 낮은 인물들까지 굳이 성씨 하나로 불리는 이름을 부여하며 호칭하는 탓에, 독자로서는 너무 기억해야할 인물들이 많아진 감이 있습니다.
결말을 보게 된다면, 결국 거세된 이름 또한 작가의 설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눈에 걸리는 돌부리를 세어보면, 적지 않은 피로감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2) 설정만 움직이는 SF라는 장르
고백하자면, 작품 소개를 봤을 때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일반적인 작품의 소개글이라고 하면, 그 작품의 핵심적인 줄거리를 간략하게 제공하며 흥미를 끄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소개글은 ‘핵전쟁으로 지구 종말을 맞았고, 두 개의 행성으로 인류가 이주했다’는 배경설정과, 그 행성의 세부설정이 전부입니다. 의도적으로 줄거리를 가린 셈인데, 그 의도를 다음과 같이 추측했습니다.
첫째, 이 작품의 배경 자체가 하나의 주제이기 때문.
둘째, 이 작품의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줄거리이기 때문.
셋째, 핵심 사건을 고를 수 없는 옴니버스식 군상극이기 때문.
넷째, 독자들이 작품의 배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아서(?)
물론 모든 정보를 제공할 필요는 없지만, 줄거리 자체보다 배경설정을 우선시해야만 했던 이유가 존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 소설이 굉장히 규모가 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핵전쟁과 지구 종말 같은 경험해본 적 없는 세상을 그리며, 수많은 행성들을 오가는 장황한 이야기를 기대했다는 뜻도 됩니다.
현재, 소설을 완독한 저로서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습니다.
분명 이 소설은 매력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끊임없이 부딪히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깨달음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이 ‘SF’라는 틀에 담겨 있을 필요성에 대해 작게 의문을 달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판타지(Fantasy)라는 장르를 다루는 이유를 설명할 때, 보통 ‘상상의 한계를 넘는 것’에 초점을 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을 넘어, 일상에서 바라볼 수 없는 사건을 다루기 위해 환상성을 이용하는 셈이죠. 물론 개연성과 핍진성을 비롯한 기술적인 테두리는 필요하겠지만, 일반적으로 판타지에서 다루는 사건은 현실에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반면에 이 <태초의 빛이 있었다.>는 그 환상성의 기준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모두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인 것을 넘어, 현실에서밖에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을 다루고 있죠.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그 배경설정에 기초한 언어와 행동이 등장합니다만, 이 작품의 인물들이 다루는 사건은 매우 현실과 흡사한 것을 넘어 현실 그 자체를 옮겨오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정치인의 고뇌, 행성의 민주화 운동 등 이미 우리 역사에서 다뤘던 그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며, 그 행동은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특히 결말에 다다라서 등장하는 촛불시위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시위자 같은 소재는, 채 10년도 되지 않은 뉴스에서 등장했던 사건을 그대로 떠올렸습니다. 아마 그에서 모티브를 따왔으리라 추측합니다. 먼 미래를 다루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무기를 다 제쳐둔 채 ‘물대포’라는 친숙한 수단으로 진압하는 과정만 봐도 그렇습니다.
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저는 작중의 인물들로부터 핵전쟁, 지구 종말과 같은 위기감 넘치는 배경을 전혀 느끼지 못 했습니다. 여유롭게 장을 보거나 평화롭게 커피 값을 두고 협상하는 장면만 봐도 그렇습니다. 단어 몇 개만 고친다면, 20세기 운동권 시절을 다뤘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작품 소개에서 언급하는 배경설정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희미하다는 얘기도 되겠습니다. 비유하자면 <스타워즈>에서 우주선과 광선총을 준비해놓고, 지구 도심가에서 각목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만약 이 작품이 <서울의 봄>이나 <화려한 휴가>처럼 그 시절 군부독재 정권과 시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어떠했을까요? 저는 큰 고민 없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가 됐으리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행성과 종말 같은 설정들 덕에 익숙하기만 한 이야기가 비틀렸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이 지구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부분에 조그마한 물음표를 달아봅니다.
3)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결말
아마 <태초에 빛이 있었다.>라는 제목만 봐도, 많은 독자들이 여느 종교와 관련된 이미지를 떠올릴 거라 생각합니다. ‘태초’ 혹은 ‘빛’과 같은 단어에서 느껴지는 장엄함만 봐도, 그 주제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결말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수소폭탄을 터뜨려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린다는 결말은, 결국 앞선 이야기들은 파괴와 충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작가님께서는 이 결말을 만든 인물에게 ‘유주’라는 이름을 제시하는 것으로, 앞선 이름이 거세된 서술이 모두 의도적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다만 그 ‘유주’라는 인물의 고통에 공감을 하면서도, 그녀 하나만이 이 모든 고난에 ‘이름’이라는 특이점을 받을만한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가 든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이 인물에게 그 특이점을 부여한다면, 나머지 인물들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혹은 가치가 없다는 반증으로도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재단하는 기준 또한 독자로서 모호하게 다가왔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결말에 대해 다소 주관적인 해석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이 결말은 모든 것의 종말을 알리는 듯한 내용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이 종말을 만든 주체가 ‘유주’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조금 다른 시선을 갖게 됩니다. 성경에 따른 인류의 시초에게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이 붙었듯이,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린 여자에게도 마지막 이름이 붙었다는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기 때문이죠.
현재 <태초에 빛이 있었다.>의 결말이 인류의 멸망 그 자체를 의미하는지는 다소 모호한 감이 있습니다. 다만 훗날에 또 다른 인류가 이 인물들의 기록을 발견한다면, 이 ‘유주’라는 이름은 여러 의미로 회자될 것이 분명합니다. 페이지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이 소설과 함께 했던 독자로서 공백에나마 그 기대를 잡게 구겨두는 바입니다.
멋진 작품을 보여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