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지언 감상

대상작품: 우물 (작가: 지언, 작품정보)
리뷰어: 무강이, 4일전, 조회 18

호러 작가, 독자들이 무당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한국의 종교 체계는 유(儒), 불(佛) 그리고 무(巫)로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정조 대 쯤에 크리스트 교 계통이 들어오고, 더 나아가면 동학농민운동의 천도교가 있다. 필자의 주된 관심사인 조선의 주된 통치 종교는 유교. 뒤늦게 정권을 잡은 유교는 기존 고려의 통치 종교였던 불교를 밀어내기 위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펼친다. 거기에 무당은 논할 가치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지네 설화’를 아는가. ‘지나가던 선비’가 ‘인신공양’을 받아먹는 ‘지네 요괴’를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들. 이를 단순히 ‘재밌는 설화’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소재로 차용할 수도 있으나, 의미를 해석하는 법을 알게 되면 ‘단순한 설화’ 정도로 읽히지 않는다. 지나가던 선비, ‘유학자’가 ‘인신공양’을 하던 ‘신’을 살해했다고 읽으면 무슨 의미인지 전달이 될까.

그렇다. 유교가 기존의 무속의 인신공양 체제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근대화’ 설화다. 음, 조선은 제대로 된 근대를 맞지 못했으니까 ‘조선화’라고 할까. 우리나라에 ‘지나가던 선비’가 주된 설화의 주인공인 이유는 그만큼 유교가 대세였다는 이야기다.

물론 내가 단독으로 내린 해석은 아니다. 친구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다.

 

이쯤 되면 왜 무속 관련을 좋게 보지 않았는지 알 것이다. 그렇다. 괴력난신(怪力亂神) 운운하는 유학자의 피가 나름대로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당의 매력에 동의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파묘>도 극장에서 나름 재밌게 봤다. ‘굿’이라는 시청각적인 퍼포먼스를 해야하는 무당이니만큼,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바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바다 건너 일본인마저도 홀려 <흑무경담>이라는 작품까지 나오게 만들었을까.

‘한국적인 정서’를 찾는 70년대, 80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무당은 핫한 주제였다. 서정범이나, 조자용 같은 학자들이 그 주제를 파고들었는데, 이들이 연구에는 한 가지 돌부리가 나와있다. 바로 ‘정치’라는 것. 독재 시기였고, ‘한국’에 앞서 ‘민중’에 골몰하던 시대다. 그랬던 연구자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을 리가 없다. 나름대로 귀중한 연구 자료들이었지만,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대통령을 개같이 잘못 뽑기는 했어도, 다행히 그 정도의 시대는 아니다. 다행히 요즘 세대는 우리 문화를 색안경 끼고 보지 않을 수 있다.

아, 문제는 말했듯 역시 대통령을 개같이 잘못 뽑았단 거다.

 

늘 그렇듯 긴 잡소리지만, <우물>을 이야기하려면 필요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우물>이 무당 이야기라서다. 주인공인 시현은 박씨 무가의 자손이고, 강원도 마을에 ‘사람 잡아먹는 우물’에 교수와, 그리고 방송국 팀과 함께 찾아간다. 늘 그렇듯 그런 동네에는 험한 게 나오기 마련이고, 정말로 험한 게 있어서 그걸 퇴마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요즘은 이런 걸 ‘포크 호러(Folk Horror)’라는 힙한 장르명으로 부르더라.

개인적으로 이런 ‘포크 호러’ 류의 감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사족으로나마 덧붙이고 싶다. 왜냐면 도시인이 시골을 싫어하는 만큼이나 시골인이 도시를 싫어하는 마음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작품을 폄훼할 이유가 못 된다는 것도 안다. 나름 그 사이에 끼인, 부산 사람의 넋두리 정도로만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그럼에도 나는 <우물>이 동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고 평하겠다. 그러려면 수많은 장르를 전개함에 있어 한국에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바로 ‘관(官)’이다.

 

오래 전 모 무협 관련 게시판에서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무협’에 대한 대화를 볼 수 있었다. 육두문자가 날아다니는 사이버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이 뭔지 아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대화가 점잖았다. 그 중 기억에 남았던 건 이 말이다.

“한국은 정부가 너무 세서 무협 맛을 살리기 힘들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무협에 빠삭한 골수 독자들이라 그런지 각종 대답도 좋았지만, 문제의식부터가 남달랐다. 필자가 조금이나마 주워들은 자료를 동원하면, 한국은 적어도 조선때부터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내려와 CCTV가 곳곳에 난무한다. 저기 먼 곳 텍사스에서는 수상한 사람 있으면 쏴죽이려고 총까지 챙겨야 하는데 우리는 다행히 파출소가 많아서 그럴 필요까진 없다.

문제는 그 파출소가 여기저기 많은 것과 별개로, 필요할 때 제 기능을 하느냐는 것이다. 단순히 오늘도 열심히 복무하는 파출소 순경을 뭐라하려는 건 아니다. 정부가 자국 내에서 힘이 강한 거랑 별개로,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가느냐? 글쎄. 한때 붉은 운동도 하셨던, 여전히 존경하는 아버지가 맨날 거실에 TV조선 틀어놓는 것만 봐도 아닌 것 같다.

 

정부와 민중으로 극단적으로 갈린 상황에서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다들 이미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한 듯 하다. 칼끝이 가야 할 곳은 정부, 혹은 기업이다. 그러나 찌르는 방법은 수없이 많고, 그것은 초식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체제 안에서 방법을 모색하는 것. 이는 <산나비>가 ‘조선’에 ‘사이버펑크’를 더해 칼끝을 ‘조정’과 기업 ‘마고’로 향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꼭 그러라는 법은 없다. 그 결과 무협은 ‘조선’을 버리고, ‘중세 중국’을 택한다. 무협적인 중세 중국에서는 황실이 땅 저변에 닿지 못하니, 이는 정부가 국민을 버린 느낌을 주기 좋다. 나라가 사람을 살려주는 게 아닌데, 어떻게 살 것인가? 아무래도 우리끼리 사는데 ‘협(俠)’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껏 내가 추구해왔던 ‘선비’가 전자를 추구한다면, 후자야말로 ‘무당’에 속한다. 선비는 지배 이데올로기 안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만, 무당은 자신의 ‘신(神)’을 따른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한국 저승에도 공무원은 존재해서 현장직으로 파견된다. ‘저승사자’를 말한다. ‘강림 도령’이 단골 손님이다. 부적 등에 사용되는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은 ‘이와 같이 처리함’으로서 일종의 인증 도장이다. 그렇다. 저승도 정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일종의 무당으로 (작품에서는 제자, 선무당 등으로 언급된다) 저승사자는 아니니 체제의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애초에 현세 한국의 일이야 한국 정부가 관리하지만, 죽은 자의 일까지 한국 정부가 관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제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산 사람도 제대로 관리 못하는 판국에 죽은 사람까지 어떻게 관리하겠는가.

그렇다면 사람이 관리받지 못하는 ‘바깥’의 영역에서, 관리되지 못하는 영역에서 무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협(俠)’이 사람(人)을 어깨에 ‘업는’ 일이듯, 누군가는 ‘넋’을 ‘업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물>은 이승도 저승도 버린 바깥의 넋을 업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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