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리뷰를 봐온 분들이라면 제목을 얼마만큼 중요하게 여기는지 아실 것이다. 필자의 리뷰를 처음 읽는 분이라면 필자가 ‘제목 집착증’이 있다는 정도로만 아시면 될 것이다. 요는, 필자는 누가 나의 동반자라 부를 수 있을지 신경쓰면서 읽었다.
본 작품의 세계는 머리에 AI를 박고 실시간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환경 맞춤 실시간 광고를 본다. ‘링크’라는 존재가 정보와 광고를 띄워주는데, 단번에 필자는 ‘링크’를 ‘나’의 동반자라고 생각했다. 일상 생활에서 링크와 겪은 소동이 작품의 스토리를 끌고 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휴머노이드 X와 하영이법의 등장으로, 극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영이법은 제법 논리적으로 들린다. 죽은 사람의 데이터를 학습해서 그를 모방한 휴머노이드를 만든다는 점에서 유가족들이 마주한 가혹한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고 법적 장치가 여럿 존재하지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본다면, 죽은 사람을 닮은 꼭두각시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다. 필자에게 불안감을 안긴 채 이야기는 이어진다.
‘나’의 친구인 민아는 ‘지오’를 만든다. 민아와 지오의 부모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지오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을 여기저기서 따와 기워만든 키메라 같은 존재다(이건 극 중 설명이다).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산 사람에게 불필요한 기억과 행동을 편집해야겠다는 발언은 ‘지오’를 지오 껍데기를 쓴 무언가로 본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입맛대로 만든 동반자인 셈이다.
‘지오’가 사람들이 만든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지오에겐 불쌍하지만 살아있는 민아와 지오의 부모는 죽은 지오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다. 하지만 ‘지오’는 지오가 되라는 목적함수를 이루기 위해 갖은 행동을 한다. 이것을 보고 지오를 만든 사람들은 ‘지오’에게 지오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오’는 나에게까지 접근해서 지오의 기억을 추출하려고 하며, ‘지오’는 더욱 지오가 되려고 한다. 대체 지오란 무엇이란 말인가. 지오의 데이터를 더 얻는다고 해서 ‘지오’가 지오다워질 수 있을까? 급기야 ‘지오’는 ‘나’가 원한다면 여전히 잊지 못하는 전 연인 남선이 되어줄 수 있다고 회유한다. X는 누구나 될 수 있을까? 필자는 여기서 ‘나’가 ‘지오’에게 굴복하며 ‘남선’을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가 용기내어 진심을 담은 메일에 진짜 남선의 답장을 보낸다. 쭈니, 라는 애칭으로 시작하는 메일은 ‘나’의 동반자는 머릿속에 살고 있는 링크도, 남선이 될 수 있는 X도 아닌 실제 존재하는 남선뿐이라는 걸 보여준다.
데이터를 학습한 휴머노이드는 결코 ‘그’가 될 수 없다. 즉, 그에 관련한 모든 데이터를 집약해서 학습해도 그가 될 수 없다. 만들어진 ‘그’를 직접 대하면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지오’의 말처럼 데이터가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오를 다룬 모든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지오’는 지오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스스로를 구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기억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각자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순 있겠지만 그가 가진 원형은 오직 그의 생각과 행동으로 만들어진다. ‘지오’는 민아의 욕심으로 편집된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점점 지오와 멀어지게 된 걸지도 모른다. 기억은 당사자에게 유리하게 왜곡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읽으면서 다소 아쉬운 점이랄까, 혼란스러운 부분을 말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링크’의 존재가 극에 필요한가 싶었다. 링크는 ‘나’의 마음 속 양심처럼 딴죽을 걸며 극의 분위기를 해소시키는 역할 정도로만 보였다. 물론 ‘링크’가 필요한 설정은 맞다. 실시간으로 뇌를 스캔하며 데이터를 업로드시키고, 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링크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한가, 물으면 잘 모르겠다. 뇌에 칩을 박지 않아도 인공지능을 이용한 서비스 정도로 보여줘도 충분해 보이는 굳이 머릿속에 박아넣을 이유가 있을까. 링크에 거부 반응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스마트폰 시장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아니면 링크를 써야만 하는 이유를 보였다면 납득할 수 있었을지도. 링크 때문에 아침부터 두통에 시달리고 광고를 억지로 봐야하고 보도블럭에 넘어질 뻔한 걸 보면 편리한 점보다 불편한 점이 더 눈에 띄었다. 좋은 점은 검색이 간편하고 메일 보내기가 편하다 정도인데 이건 스마트폰과 siri와 빅스비로도 충분하다(이건 필자가 쓴 ‘우리의 밤’에도 비슷한 지적을 받았다. 편리해보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머리에 칩을 박을 만한 결정적으로 납득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
또한, X—‘지오’가 ‘남선’이 되어주겠다는 이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오가 되기 위해 ‘지오’의 데이터를 갈구하는 건 알겠지만 ‘나’를 찾아와 ‘남선’이 되어주겠다? 그 이유가 인간을 따르고 싶고, 닮고 싶고, 너희에 대한 모든 걸 배우고 싶다는 ‘지오’의 말은 ‘나’를 찾아온 충분한 이유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스토커처럼 ‘나’가 약해졌을 때를 적절하게 찾아온 건 좋은 타이밍—이건 ‘링크’가 알려준 걸까?—이었지만, ‘나’를 무너뜨리기엔 적절한 대답일지 몰라도 독자를 무너뜨리기에는 조금 아쉽지 않나 싶다. 어쩌면 필자의 이해도가 단순히 떨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담으로, 노벨리안을 학습시키기 위한 창작자의 노동은 합당해 보였다. 필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인공지능이 생산한 데이터로 학습을 시키면 더미 데이터만 생산할 뿐 생산적인 데이터를 창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든 데이터가 적어도 3할은 필요하다고. 어쩌면 인간이 창작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지도 모르겠다.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시간을 즐겨야 하겠다.
‘나’가 남선과 재회해서 오해를 풀고 다시 연인으로 돌아갈지, 헤어진 이유를 굳이 확인하고는 ‘지오’에게 ‘남선’이 되어줄 수 있냐 부탁할지, 그도 아니면 ‘링크’와 할부 기간이 끝날 때까지 불편한 동행을 할지 궁금하다. 돈벌이가 떨어졌든 스스로 선택했든 동반자 없는 삶을 선택할지도 모를 일이다. 링크도, X도, 남선도 필요없다고 말이다. 어떤 선택이든 ‘나’가 행복한 선택이길 바라지만 ‘나’가 처한 상황을 보면 그건 또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언제나 쉽지 않으니.
아쉬운 점을 (뻔뻔하게) 적었지만 사피엔스 작가님의 작품을 읽는 건 언제나 즐겁다. 특히 SF소설은 더욱 기대하게 되는데, 필자 개인적인 생각으로 SF소설은 크던 작던 독자에게 질문거리를 던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의 고유한 외형과 그가 가진 기억이 융합된 복합체일 뿐인가. 나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외형과 정신을 완전히 본딴 로봇은 나일까. 좋은 질문거리를 던져주어 정말 즐거웠고 정말 감사하다.
필자가 (뻔뻔하게) 아쉬운 점을 적었지만 일개 독자의 감상일 뿐 본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는 점에는 틀림없다.
좋은 작품을 보여준 사피엔스 작가님께 감사 말씀 드리고, 아쉬운 점은 한 독자의 감상일 뿐이라고 아량넓게 봐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