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음란하다 공모(감상)

대상작품: मार पापीयस् (마라 파피야스) (작가: 김은애, 작품정보)
리뷰어: 드비, 3시간전, 조회 4

나는 음란한 사람이다.

 

그러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 스스로를 까발릴 마음이 든 건 순전히 알아보지 못할 문자를 제목으로 하는 이 작품과 거기 담긴 이야기 때문이니, 나는 이 작품을 접하고 느낀 동요와 경외, 씁쓸함을 한데 담아, 리뷰를 남기고자 한다.

 

 

이 작품 속 ‘무염’이라는 인물은 구도자(求道者)다. 물론 ‘스님이니까 구도자겠지’가 아니다. 스님도 다 같은 스님이 아닌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종교인의 탈을 쓰고 그것을 업으로만 삼거나, 추악하다 해야 할 자들도 존재한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종파, 계파를 가리지 않고 그러하고 그러해 왔으니, 이렇듯 심심찮게 글쟁이들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 작품 속 무염의 모습은 진정 숭고함을 지키려는, 치열하다 해야 할 만큼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구도자의 그것이다. 나 같은 범부로서는 그저 경외로울 정도다.

허나, 오랜 세월 지켜온 무염의 의지는, 그의 일상에 뜻하지 않게 동행하게 된 한 여인에 의해 뒤흔들린다. 그녀가 무염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내면, 깊숙이 누르고 있던 그것이 불현듯 기어 나와 똬리를 틀고 무염을 괴롭힌다.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수십 년을 눌러두어 마치 원래 없던 것인 양 잊고 있던 그것이었다.

그러한 마음을 거부하려 발버둥 쳐보지만, 속수무책이라 해야 할까… ‘DELETE’ 키로 ‘삿됨’이란 영역을 삭제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닌 탓에, 무염은 번민하고 또 번민한다.

범부라면 어떠했을까. 최소한 상대가 자신을 바라고, 나 또한 솔로라서 꺼리낄 게 없는 상황이라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 중 으뜸, 살과 살이 만나고 달뜬 숨이 토해지는 지고지순, 그 오묘한 운우의 극치를, 즐거움을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염은 아니다. 극의(極意)를 추구하는 그에게 있어서는 욕망이란 한낱 허망한 것, 공든 탑을 무너뜨릴 덫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게 발버둥이라 해야 할까. 끝끝내 그러한 애씀은…. 허망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참담한 장면으로.

나는 글을 읽어가며 혹시 아가는 진정 무염을 염려한 (어쩌면 애정했을 지는 모르나 유혹의 마음은 없었을) 여인인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녀는 다만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무염을 지키고 싶었을 것 같다고, 정신을 잃은 채 부들부들 떠는 것만 같은 그를 안아주었던 것이고, 그것은 다만 ‘보살’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라고.

그러나 무염은 자신을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다른 것’으로 본다.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경계, 단호함은 그 순정을 삿된 마귀의 환상으로 여기고, 단호히 내리친다… 아가를 라가라 여기며 그 머리를 목탁으로 내리치는 장면은 정말로 입을 틀어막게 된다. 묘사된 피로 연상되는 건 그녀의 허망한 죽음이니, 참으로 황망하다 하겠다.

오해가, 망상이 가져온 비극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아가라는 여인이 라가이며 이 모든 것이 무염의 열반을 방해하려는 – 마, 마라 파피야스의 소행이었던 것일까? 그리하여 무염은 진정으로 극의를 방해하려는 삿된 것을 물리친 승리자였을까.

음란함과 평범, 그리고 비범… 고아함, 순절함의 경계는 무엇인가.

모르겠다. 이 작품은 관계와 열망, 상대에 대한 판단 혹은 오해… 그 경계에서 기묘한 비틈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한 가지 생각이 아닌 깨달음을 강요하는 것만 같다. 구도자의 저 극단적인 정순에의 열망을, 범부로서는 그저 피상적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데, 저 비극이 결말인 것일까 씁쓸함을 느끼려는 찰라, 뒤에 안배된 또 다른 결말을 보고- 나는 솔직히 안도했다.
보호자가 담담히 병원 치료를 받기 위해 함께 온 상황이라는 것은- 실제 그러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이 전의 그 모든 사건이 다만 무염의 심의(心義)가 만들어낸 환상이었을 것만 같아서….. 나는 안도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필자가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느끼는 결말일 뿐, 작가님의 안배와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맞다 틀리다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른 분들은 또 다르게 받아들여졌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터다.

또한 자칫 함부로 소모되기도 하는 ‘치매’라는 장치는- 이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짧지만 훌륭히 반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본다.

 

연로함이란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고 있음을, 죽음에 가까워져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자신에게 시간이 많지 않음을 느끼던 무염은 더 간절했을까. 그리하여 더 필사적이었을까. 현실 속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인 주인공은 그러한 몽환적 상상 속에서, 그렇게 이성의 시간이 흐릿해져 가던 와중에도- 지치지 않고 정순함을 갈망하고 있을 거라 짐작하며- 나는 경탄과 씁쓸함을 느꼈다.

필멸자인 범부로서, 부처가 되고자 치열히 싸운 이의 세상을 잠깐 엿본 기분…. 간만에 만난 수작에 많은 생각을 했다. 다만 한 번 보고 이해하긴 어려웠다. 불교인이 아니라면 더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와 상관없이, 최소한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짧은 만큼 최소 두, 세 번 곱씹어볼 만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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