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재난에서 ‘인간’을 벗어나는 이들의 이야기 공모(비평)

대상작품: 굶주린 도시 (작가: 작은연못, 작품정보)
리뷰어: 소나기s, 1일전, 조회 8

1)

 

 

현대사회에서 ‘좀비’라는 소재가 주는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재난’의 이미지에 기반하고 있다. 익숙하던 환경이 망가지고, 가까운 이웃이 변해가며, 곧 이어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가며 벌어지는 ‘재난’의 원인으로 ‘좀비’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끼워넣으며 인과를 맞추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난’ 그 자체가 아니다. 결국 이 ‘재난’이 뒤바꿔놓은 환경에 처한 인물들을 조명하는 것이, 해당 작품에서 ‘재난’을 사용하는 목적이다. 익숙하고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던 인물들이, 해당 ‘재난’에 처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해당 장르를 분석하는 팬들에게 있어서 주요 구경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굶주린 도시’는 굉장히 영리한 작품이다. 작가는 ‘좀비’라는 소재를 제시하면서도, 결국 해당 장르에서 보여줘야만 하는 것은, 이 ‘좀비’를 맞닥뜨린 ‘인간’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때문에 작품 대부분의 서사를 주인공과 그를 지켜주는 여성에게 할애하며, 그들의 환경을 무너뜨린 ‘좀비’에 관해서는 ‘원인’이라는 시작점을 잡아주는 것 정도로 분량을 맞추는 것이 느껴진다. 실제로도 그들을 위협하는 것은 좀비가 아닌, 이러한 환경에서 도덕성을 잃은 ‘사냥꾼(인간)’이다.

 

다만 ‘재난’이라는 환경으로 변화에 낯선 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 인물들에 한정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러한 ‘재난’ 더 나아가 ‘좀비’라는 소재에 대해 많은 것들을 학습한 상태이며,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재난’에 처한 ‘인간’에 관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에서 나오는 인간의 변화는 무척이나 익숙한 이미지의 연속이다. ‘좀비’라는 환경에서 도덕성이 파괴되고, 삶에 대한 욕구를 이기심으로 자극하며, 성욕과 식욕 같은 원초적인 본능에 휘둘리는 모든 과정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가 ‘좀비’라는 장르 이상으로 ‘인간’이라는 장르에 익숙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그 익숙함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여, 많은 이미지들을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빌려오는 데 그치고 있다.

 

앞선 내용에서, 작가가 ‘재난’이라는 소재에서 인간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호평했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인간’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 나머지 것들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 셈이다. 당장 현대에서 ‘좀비’라는 소재를 다루기 위해, 이 ‘좀비’에 차별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에 비하자면 굉장히 게으른 선택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2)

 

그렇다면 작가가 고찰하는 ‘인간’의 문제는 어떨까? 우리는 이미 수많은 작품들로 인해 이러한 ‘재난’ 속에서 파괴되는 인간성을 끊임없이 학습해왔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자신이 학습한 ‘인간성의 파괴’에 대해 원초적인 주장을 반복하며, 그 이미지를 우직하게 반복하며 분량을 채워나갔다.

 

“배고픈 인간이 좀비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배고픔에 윤리와 도덕을 내려놓은 인간들은 좀비와 같은 짐승…….”

 

작가가 소설에 직접적으로 삽입한 주제의식은, 사실상 소설이 아닌 웅변에 가까운 무언가처럼 느껴진다. 기본적인 욕구에 휘둘리는 것이 짐승의 속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혹여, ‘가장 무서운 건 인간’이라는 대사를 못 들어본 사람이 있는가?

 

결국 작가는 익숙한 이야기를, 익숙한 방식으로, 더 나아가 익숙한 시야에 언성을 높이며 주장하며 소설을 마무리한다. 이 모든 것들의 문제는 결국, 작가가 ‘인간’에 대한 고찰에 ‘경험’이 배제된 채, 현대사회에서 응용되는 이미지들을 그대로 빌려오면서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3)

 

하지만 주제의식이 반드시 신선할 필요는 없다. 고찰이 남다를 필요도 없다. 결국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틀에 담겨 있다.

 

‘소설’은 만들어지는 ‘이야기’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주제의식을 담기 위해, 작가가 그려낸 ‘이야기’, 즉 인물의 ‘서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실 해당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서사 또한 무척 원초적인 감이 있다. 주인공은 가족이라고 믿었던 집단에게 배신당하고, 여주인공은 동생의 죽음을 막지 못 한 것과 더하여 인육을 먹고 스스로 믿었던 인간성이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모두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결국 ‘인간’에 의해 상처 입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기이할 정도로 해당 경험에 대한 서사보다는, 그 경험으로 얻는 감정에 대해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모든 것들을 ‘상처’라는 직접적인 단어로 규정하며 동정을 유도하고, 주인공의 배신담은 그 줄거리보다는 배신으로 벌어진 아픔을 설명하느라 많은 것들을 소비한다.

 

독자들은 좀비가 아니다. 글을 읽으며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고, 느낄 수 있는 가슴이 있다. 해당 서사는 누가 읽어도 상처에 관한 이야기고, 파괴에 관한 이야기다. 독자가 느낄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한 방식으로 주장하는 과정은 적지 않은 피로감을 선사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인간성에서 벗어나, 직접적으로 인간을 벗어났다는 묘사를 곁들인 결말은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주인공에게 동생을 겹쳐보며 마지막 인간성을 지키는 여주인공의 최후가 지나치게 신파적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이 소설에는 많은 것들이 상징으로 담겨 있고, 주장으로 담겨 있으며, 그것은 때때로 일방적이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표출된다. 결국 인간으로 비롯되어 인간으로 상처받는 이야기를 철저하게 지키는 작가의 고집은 이 글이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반증할 때도 있었다.

 

다만 작가가 말하는 ‘인간’이 너무 익숙하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만큼은, 이 글속에 작게 구겨 넣어 본다. 결국 이 글을 읽고 생각하는 나도 틀림없는 ‘인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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