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부는 익숙한 동화들을 하나씩 엮는 흥미로운 구조로 시작합니다. 서윤이를 위해 만들어진 달콤한 세계에 나오는 친구들은 서양 동화들에 나오는 이름을 쓰지요. 하지만 점차 그 아이들도 서윤이와 크게 멀지 않은 나라에서 왔을거라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2007년에 나온 [헨젤과 그레텔] 영화가 떠오르더군요.
처음에 서윤이를 불행하게 하는 요소는 외로움입니다. 이 외로움은 상당히 미성숙하고 폭력적인 대화 양상을 보이는 부부의 합작이지요. 하지만 서윤이가 가장 밀접한 충돌을 경험하는 상대는 아버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 곁에 더 자주 있어야 하는 어머니입니다. 이 또한 낯설지 않은 구도 입니다.
정신 질환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폐쇄 병동, 약물 치료, 전기 치료 등이 개인의 창의력/생명력/순수함을 짓누르는 요소로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시계태엽 오렌지] [셔터 아일랜드] 등 유명한 예시들이 있지요. 하지만 실제 병동 내원과 복약경험은 그보다 더 복잡합니다. 단순한 ‘억압’이 아닙니다. (아이가 이상 증세를 보일때 바로 가족 상담을 잡고 아이의 약물 치료도 병행할 정도면 상당히 진보적인 부모입니다.)
폭력의 시작은 단 한 번의 폭발
여기에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명화가 서윤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아이들이 꿈속에서 거인을 터뜨리는것과 아주 다르죠. 어머니가 행사하는 폭력은 서윤이의 심상세계에서 별사탕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현실을 살라’ 압박하는건 서윤이에게 심상세계를 터트리는 행위의 연장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 연결점을 중심으로 이야기 구조를 만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명화는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대신 본인의 답답함을 위주로 행동하고 있지요. 이는 아이가 치료를 거부하고 상상의 세계로 파고드는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이가 어른을 사랑하는 만큼 어른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앤은 끝없이 용서하고 희생적인 웬디의 ‘사랑’을 ‘이상적인 어른의 사랑’에 등치시킵니다. 앤은 그 반대로
자신의 사랑을 하고자 하지요. 서윤이 대신 현실을 견뎌내고, 복수를 실행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윤이는 어머니와의 관계구도에서 소외되고, 현실에서 사라집니다. 이야기는 서윤이에게 도피 외의 선택지를 주지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