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았다 – 빨간 맛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말풍선 컴필레이션 (작가: 말풍선, 작품정보)
리뷰어: BornWriter, 17년 7월, 조회 132

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그것은 매우 무덥고 습한 여름밤의 이야기이다. 자정이 꽤 지났는데도 나는 가슴이 아파서(물리적인 통증, 흉통) 침대에 뻣뻣하게 누운 채로 트위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때, 쎄씨 님의 찬사 가득한 단편 추천이 올라왔다. 무려 “금세기 최고의 로맨스!” 라는 이야기에 혹해서 링크를 받아보았다. 아무리 로맨스와 거리를 두고 사는 사막같은 성품이라지만, 금세기 최고의 로맨스라고 하니 안 읽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론만 놓고 보면 나는 크게 속았다.

나는 작품을 읽기 전, 빨간 맛이라는 제목만 보고서 내용을 추측해보았다. 이것은 필시 “인육은 빨간도 좋지요”의 의미를 숨기고 있는 제목이 아닐까! 쎄씨님이 자기만 당할 수 없어서 모두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읽어보는 수밖에, 그런 생각으로 술술 읽어내려갔다.

 

굳이 말하자면 이 작품은 먹고 사는 비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의 친구 ‘그 애’는 뱀파이어 비슷한 것이고, 피를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데, 피를 먹기 위해서는 키스를 해야 한다. 타액에 마취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 내에서 ‘그 애’는 터럭 달린 것과 키스하는 것에 대한 엿같음을 살짝 드러낸다. 그렇지만 하고 싶지 않은 키스를 하는 까닭은 결국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대목을 읽을 때 문득 내 삶을 생각한다. 나는 살아있으니 먹어야 하는데, 먹기 위해서는 원치 않는 더러운 일과 마주해야 한다. 가령 질나쁜 농담이나 내뱉는 교수님 앞에서 웃으며 맞장구 치고, 좋은 회사로 향하는 추천장을 받아내야 하는 일이 그러하다. 이러한 인내는 월등히 좋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거창한 마음가짐이 아니다. 그저 현상유지를 위해 나는 역겨운 목소리 속에서 웃어야 하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은 그토록 슬픈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작품의 ‘그 애’를 어떻게 볼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그 애’는 먹고 사는 것의 비애를 함축적으로 녹여낸 캐릭터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떤 캐릭터일까. 나는 두 가지 시선으로 이 친구를 보았다. 하나는 이러한 ‘먹고 삶’의 격차를 극대화시키는 존재이다.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다른 친구들은 ‘그 애’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 깜짝 놀랐잖아.”

“왜… 왜?”

“대낮부터 어떤 남자랑 키스하고 있더라니까!”

“나, 남자?”

“그래! 한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말이지! 더러워 정말!”

내가 본 남자는 그 정도로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았었다. 기껏해야 대학생 정도였을까. 즉 그 애가 다른 남자를 만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애가 너한테 뭐래?”

“아니, 그 애는 내가 본 거 모를걸. 보자마자 도망쳤거든. 어휴 지금도 닭살이 돋는다. 그게 그 원조교제라는 거겠지?”

식사라는 것은 때가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틀치 식사를 모조리 때려넣는다고 해서, 앞으로의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밥을 당겨서 먹을 수가 없기에, 식사는 규칙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하루 세 끼의 식사를 목 아래로 넘기면서, ‘그 애’는 먹고 사는 것의 더러움을 곱씹는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친구는 다른 존재이다. 친구의 식사는 그녀 본인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이 벌어온 돈으로 차려지는 식탁 위에서 친구는 먹고 삶의 더러움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그토록 수고를 들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원조교제라는 단어는 내게 두 가지 느낌을 주었다. 하나는 주인공의 친구가 먹고 사는 더러움을 정말 모르는 구나. 다른 하나는 주인공의 친구가 그것을 모르기에 이토록 원색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한다. 주인공의 친구는 이러한 섭리를 모르는 존재이고, 주인공은 친구와 ‘그 애’ 사이에서 먹고 삶의 더러움을 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은 다른 역할도 부여받았다. 그것은 ‘먹고 사는 것의 더러움을 이해하게 되는 존재’이다. 주인공은 이러한 섭리를 천천히 이해하게 된다. ‘그 애’는 주인공에게 흡혈에 따르는 리스크에 대해 설명한다. 리스크는 아래와 같다.

키스 한 번 = 키스의 순간을 잊는다

키스 두 번 = 나를 잊는다

키스 세 번 = 뱀파이어 비슷한 것이 된다

키스 네 번 = 키스

내 경우에는 ‘나를 잊는다’가 이상하게 뇌리에 오래토록 남았다. 어째서일까, 싶어서 조금 고민을 해보았다.

‘그 애’에게 키스라는 것은 먹고 사는 것의 괴로움이다. 그런데, 키스는 동시성을 갖는 행위이다. 어느 손이 먼저 시작하는 박수가 없는 것처럼, 어느 입술이 먼저 부딪히는 키스는 없다. 모든 키스는 동시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먹고 사는 것의 괴로움’ 역시 동시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먹고 사는 것의 괴로움을 처음 겪을 때는, 겪었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괴로움이 누적되면 나를 타자화한다. 이것은 내가 이영도 작가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저열한 농담을 던지는 교수님 앞에서 나는 분명 내가 맞는데, 거기 앉아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정확히는 내가 추구하는 내가 아니다. 내 몸뚱이는 거기 앉아있지만, 그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의지에 반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수행되는 그 모든 행동에 대하여, 나는 그것이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를 잊는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나를 잊는 것을 넘어서면, 먹고 사는 괴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어쩔 수 없으니 함께가는 동반자적인 입장이라고 할까. 먹고 사는 것은 괴롭지만, 그만둘 수는 없다. 주인공은 ‘그 애’와의 키스를 상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곧 나는 나를 물들여버릴, 내 모든 기질을 변화시킬, 또한 내 미래를 영영 바꾸어버릴, 마침내 그 애 곁에 영원히 머무르게 해줄, 진하고 강렬한 키스의 맛을 느낄 것이다.

먹고 사는 괴로움을 모르는 주인공의 친구는 거칠게 말하면 ‘애’ 같다. 그러나 먹고 사는 괴로움을 아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진정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키스는 그런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그러했다.

 

지금까지의 리뷰가 대단히 ‘꿈보다 해몽’ 식의 리뷰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은 내가 읽은 작품에 대한 나의 감상이니까. 나는 몇 년 전부터 김훈을 읽어왔는데, 특히 ‘라면을 끓이며’를 읽고나서부터는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슬픔에 몸서리치고 있다. 이 작품이 이렇게 보인 까닭도 아마 김훈의 탓일 공산이 크다.

내가 이 작품을 읽은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쎄씨 님에게 속았기 때문인데, 결과를 놓고 보면 나는 속기를 잘 하였다. 잘 속아서 좋은 작품을 읽었다.

지금부터는 먹고 삶의 안타까움에서 잠시 한 발 물러나,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스테레오타입을 부추기다

늘 이야기하지만 나는 인물 묘사에 관심이 많은 글쟁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첫 문단에서 인물묘사를 수행한다.

학교 밖에서 그 애를 본 건 그날이 처음으로,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날 나는 사촌언니한테 편지를 부쳐야 해서 모처럼 일찍 일어났다.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청과물 가게에 들러 자두를 3천원어치 사기도 했다. 아침나절을 부산히 보냈더니 꽤 충실히 살고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이것이 왜 인물묘사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도 계실거라 생각한다. 그렇치만 인물묘사가 반드시 ‘외양묘사’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 한 문단은 내게 꽤 많은 스트레오타입을 부추기고 있다.

1. 학교와 여름방학 : 대학생이 쓸 표현 같지는 않고(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종강하고 얼마 안 되었다’고 할 거 같다.), 애당초 대학생이라면 학교 밖에서 볼 일이 차고 넘친다. 아무래도 고등학생 같다.

2. 사촌언니 :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내 생각보다 어릴 거 같다는 느낌을 동시에 준다. 마흔 아홉살의 사촌 언니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사촌언니가 있으면 어릴 거 같은 기분이다.

3. 모처럼 일찍 일어났다 : 느긋한 성격일 거 같다

4. 꽤 충실히 살고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 ‘충실히 살고 있다’와 ‘충실히 살고 있다는 생각’과 ‘충실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는 다르다. 전자는 단순 서술이고, 중간은 개인에 대한 평가라면, 후자는 자의식에 흠뻑 젖어있는 묘사이다. 이것은 주인공 캐릭터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알려준다.

이러한 스트레오타입이 초반에 나를 장악한다. 본문과 상관없는 사촌언니에게 편지나 부치면서 말이다! 나는 이런 인물묘사가 너무 좋다. 단순히 수준이 높은 묘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인물묘사는 나로하여금 거장의 심플한 붓터치 같은 걸 보는 기분이 들게 한다.

 

 

2. 설명하지 않는다

판타지든 SF든 너무 많이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완벽한 설명은 설정을 완벽하게 만들지, 작품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너저분하게 늘어놓을 필요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나 뭐 그런 거라는 얘기야?”

“으음….”

그 애가 난처한 듯이 말했다.

“그런 셈이긴 한데….”

“셈은 무슨 셈? 제대로 설명해봐.”

“글쎄요오.”

“존댓말은 집어치우고. 너, 뭐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피를….”

이 장면에서 ‘그 애’는 노골적으로 내가 피빱니다! 하고 주장하고 있다. 피를 빠는 것은 현상이지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애’는 반복적으로 현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돌아가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같다. 이러한 방식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문과’이다.

그 애는 자기 침이 단순히 마취의 작용만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키스한 순간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몰라. 나 문과잖아.”

설명과 동시에 추가적인 질문의 물꼬를 틀어막는다. 네덜란드 소년은 온 몸으로 댐의 금 간 곳을 막아내었지만, ‘그 애’는 문과라는 마법의 키워드로 모든 질문을 잠재워버리는 것이다.

이과가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는 학문이라면, 문과는 현상이 미치는 영향을 논하는 학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과는 침의 마취작용에 대해 1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대신 마취의 작용이 불러올 영향에 대해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독자들이 설정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방식이 수려하여 놀라웠다. 박수!

 

 

3. 이름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주요하게 등장하는 캐릭터 둘의 이름이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총명과 그 애다. 이것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지점이다.

보통 ‘별명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 친구라면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나서야 학교 밖에서 그 애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친하면 학기중에도 (가령 주말이라거나) 모여서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애는 주인공을 ‘안총명’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본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황당무계한 이름이라서, 자연스럽게 별명일 거라고 생각하게 한다.

주인공은 그 애를 그 애라고 부르는데, 그 애는 주인공을 안총명이라 부른다. 왜냐면 주인공에게 그 애를 본 기억이 없지만, 그 애에게 안총명은 부산에서부터 키스하고 지낸 사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 읽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복선이다. 작품을 읽는 도중에 그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했고, 작품을 다 읽고난 후에 기억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런 복선이야말로 정말 수준 높은 복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나는 이 작품을 정말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분량도 얼마 안 되는데 이렇게까지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사형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딱 한 군데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두번째 문단에서 갑자기 ‘먼 데 있는 상가에 이르렀더랬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그러했다. 앞의 문단과 지금까지의 문장과는 그야말로 ‘말투’가 달라져버렸다. 무언가 어우러지지 않는 어색함에 나는 “왜 갑자기 말투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 한 단어만 제외한다면 나무랄 데가 안 보인다. 눈을 씻어도 못 찾겠다.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알 수 있을 테지만, 빨간 맛이라는 제목은 “인육은 빨간도 좋지요”가 아니라 레드벨벳의 청량한 신곡 빠빠빨간맛! 궁금해 허늬!(제목: 빨간 맛) 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작가 코멘트란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뮤직비디오 링크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실을 눈치채었다. 끄트머리 사탕가게, 라는 어감이 묘하게 빨간 맛의 가사 “코너 캔디 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즐겁게도, 슬프게도 만든 이 작품을 여러분도 꼭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 그리고 이 짧은 한 줄을 빌어 쎄씨님께도 ‘나를 속여준’ 점에 감사 말씀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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