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오는 이야기 의뢰(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발톱 타투 (작가: JIMOO, 작품정보)
리뷰어: cedrus, 7월 6일, 조회 64

*결말을 포함해 작품의 전반적인 내용을 언급합니다. 본편이 길지 않은 작품이니, 먼저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발톱 타투>는 남수라는 인물이 일상에서 마주하게 된 사건과 그로부터 환기된 기억들로 구성됩니다. 사건은 의문을 남기고 기억을 불러 일으키지요. 일련의 숙고를 통해 남수는 새로운 시각으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과정을 크게 세 개의 파트로 구분할 수 있었어요. 첫 번째 파트는 동창의 죽음으로 시작해 어린 딸과 봉숭아 물을 들이고, 동네 목욕탕에서 다른 동창들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립니다. 두 번째 파트는 또 한 명의 동창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세 번째 파트는 해 질 녘 길가에서 두 명의 학생을 목격하는 순간을 그립니다. 세 파트를 거치는 동안 남수는 어떠한 의문을 품고, 곰곰이 생각하다 ‘언젠가의 일’을 떠올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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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파트, 첫 번째 문단을 먼저 볼까요. 남수의 동창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분명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동창이 우울증 환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수사는 유야무야 끝나버리지요. 이에 남수는 석연찮은 감정을 지우지 못한 듯 계속 고민합니다. 우울증이 있다면, 사람이 죽었을 때 당연하다는 듯 자살로 결론을 내려도 괜찮은 것일까 하고요. 그런데 정작 후배 형사에게 묻는 질문은 다소 의아한 내용입니다. 발톱에 타투를 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에요. 후배는 ‘남모르게 숨겼던 독특한 취향을 들켰다’고 말하고, 남수는 다시 ‘걔가 옛날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답합니다. 우울증과 죽음에 대한 의문보다도 더 깊은 곳에, 남수가 독자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다른 의문이 있는 듯합니다. 더욱이 남수의 발언은 변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요. 누구에게, 무엇을 변명하려는 걸까요.

남수가 품었던 의문이 무엇인지는 나중에야 드러나요. 발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는 일로 가족들과 옥신각신하고, 목욕탕에서 동창들을 만나면서도 남수의 의문은 선명하게 표현되지 않아요. ‘별거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괜한 의미 부여를 할 뻔했다’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애쓸 뿐이지요. 마치 숨겨야만 하는 것처럼, 입밖에 내서는 안될 일인 것처럼 직접적인 표현을 피해요. 상상하는 것조차 꺼려진다는 듯이요.

적어도 발톱 타투에 주목한 이유는 알게 되었습니다. 남수가 보기에 자신과 다른 것, 평범하지 않은 것이었으니까요. 남자가 ‘가오’가 있으니 봉숭아 물을 들일 수 없다거나, 이런 ‘이상한’ 숙제를 내주는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이 여자일 것이라거나. 이 즈음에서 재밌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어떨지’라는 문장인데요. 다른 ‘아빠들’도 당연히 자신과 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지요. 가족들과 색다른 경험을 해보는 일인데도 ‘당하는’ 거라고 여기고요. 모종의 선입견이 남수의 내면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수 스스로는 자신을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한, 말하자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요.

딸과 아내, 목욕탕에서 만난 동창들과의 대화는 남수의 편견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이상하지 않냐는 말에 조선 시대에서 왔냐는 말을 듣고, 물들인 발톱을 들킬까 전전긍긍했던 게 무색하게 동창들은 하나같이 물들인 발톱을 자랑해요. 남수의 걱정과 달리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흑역사라 불릴 일도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친구들의 칭찬에도 남수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지금의 부끄러움은 단순히 발톱을 물들였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잊고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으니까요. 별것도 아닌 일인데, ‘남들에겐 쉬워 보이는 일이 나에게만 한없이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었음을 상기합니다. 남수 자신에게도 남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나와 타인의 차이에 대해, 내게 있듯 남에게도 있을 ‘벽’에 대해 고민하게 된 순간일 겁니다.

남수의 의문은 과거의 기억을 실마리 삼아 해소됩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을 환기하고, 일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이때 주목할 만한 부분은, 첫 번째 의문이 일시적으로 해소된 듯 보이나 이는 실상 불완전한 결론이었으며, 두 번째 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올바른 방향을 찾는다는 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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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파트, 외국에서 살다 온 동창과의 만남에서 두 번째 의문이 발생합니다. 죽은 동창의 발톱 타투와 똑같은 그림이 지금 만나는 동창의 발톱에도 있었으니까요. 같은 그림을 동일한 신체 부위에 타투로 새긴 두 친구를 두고, 남수는 또 무책임한 상상을 이어가요. 모작일까, 표절일까. 바로 얼마 전에 발톱에 봉숭아 물을 들인 사람이면서요. 누군가와 공유하는 특별한 경험, 표식이었다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걸까요. 아니면 이번에도 편견에 사로잡혀 모르는 척 외면했을 뿐일까요.

그런 남수에게 동창은 또 영문 모를 말을 해요.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고, 모른 척해줘서 고맙다고요. 남수는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울고 있을 친구의 등을 두드려 줍니다. 물어보기 미안해 무슨 말이냐고 묻지 못하고요. 이 장면의 의미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우선은 남수가 겪은 일들을 따라가 봅시다.

마지막 파트에서 남수의 의문은 마침내 해소됩니다. 앞선 두 파트에서 그랬듯, 현재의 한 순간이 남수의 기억을 환기합니다. 지금 목격한 것과 비슷한 광경이 언젠가 있었습니다. ‘언젠가의 일’을 남수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독자는 그게 발톱에 타투를 한 두 친구의 일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성소수자의 존재를 남수는 계속 외면하고 배척해 왔지만, 그럴 수 없음을 이제는 깨닫습니다. 그들은 남수의 반응과 무관하게 이미 곁에 있어 왔으니까요. 남수가 알지 못했을 뿐이지요. 먼 과거에 친구들이 옆에 있었고, 바로 지금 남수와 같은 거리를 걷는 학생들이 있어요. 이들은 남수가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잠시 첫 번째 파트의 장면을 떠올려 볼까요. 남수는 ‘괜한 의미 부여를 할 뻔했다’고 생각했지요. 그 속마음에는 어떤 사고가 덧붙어 있었을까요. 남수는 무의식적으로 (어쩌면 의도적으로) 성소수자를 배척해 왔습니다. 당연히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속한 범주는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겠지요. 내 친구가, ‘옛날엔 전혀 그렇지 않았’던 동창이 그런 ‘이상한’ 사람일 리 없다고, ‘오해’를 할 뻔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이런 생각이야말로 모욕적이었다는 걸 마지막 장면에서는 깨달았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변명하는 듯 보였던 그 말은, 지금의 남수에게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겠지요. 친구가 누구를 사랑하건, 설명하거나 변명이 필요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 남수에게 오랜만에 만난 동창은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고 말했지요. 떠오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이 남수에게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동창이 말하는 그 일을, 남수는 모른 척한 게 아니라 인지조차 못했던 것이지만요. 이러한 사실이 불러 일으킨 감정은 단순히 의아함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도 그럴 게, 뭔가 해준 것도 아니고 그냥 ‘모른 척’했을 뿐인 걸요.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감사 인사를 듣다니, 그 상황에 깔린 부당함을 남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각했습니다. 어린 커플의 미래를 응원하는 마음에는 죽은 동창에 대한 애도, 자신의 편협함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녹아 있지 않았을까요.

세 개의 파트 가운데 마지막은 적은 분량만을 차지하지만, 밀도는 가장 높은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문장부터 누적되어온 남수의 의문이 최종적으로 이해에 도달하는 장면이고, 남수의 일상과 기억이 마침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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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 타투>를 읽으면서 가장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남수의 생각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우울증과 죽음의 관계를 고민하다 발톱 타투에 대해 질문한 남수의 심리를, 발톱 타투에 괜한 의미 부여를 할 뻔했다고 속으로 되뇌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지요. 더 나아가서는 ‘언젠가의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 말해주지 않아요. 이러한 서술 방식은 남수의 내면을 남수만의 것으로 남겨두지요. 한 인물의 고유한 경험을 만들어낸 거예요. 독자는 결코 온전한 형태로 경험하지 못할, 타인의 내면이라는 공간이 입체감을 지니게 됩니다.

설명을 생략하는 방식 외에 이러한 효과를 강화한 것이 있었죠. 남수가 지닌 편견을 글 속에서 지속적으로 노출시킨 방식이에요. 남자의 가오며 이상한 여자며 하는 말들이 그랬죠.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보이는 남수를, 독자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지켜보게 됩니다. 남수라는 인물의 내면에 완전히 빠져들어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게 아니라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변화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 그것을 전달하는 하나의 주체로 남수를 파악하게 되지요. 간간이 엿보기만 할 뿐인 내면에서 어떠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을까요. 남수의 경험, 남수의 기억은 한데 모여 무엇을 만들어 냈을까요. 남수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변하고 있었지요.

여기서 잠시 떠올려 보자면, 남수는 과거에 목격한 일을 이해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함께 거리를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한 커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지나가는 누군가에게는 남수와 달리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풍경으로 다가왔을 가능성도 물론 있지만요. 이러나 저러나 첫 문단의 남수를 생각하면 그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서사·기억·비평의 자리>에서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를 공간적으로 먼 곳이나 시간적으로 먼 과거에서 오는 것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야기꾼이란 먼 곳으로부터 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 어떠한 대상을 침전시키고,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건져 올리며 자신만의 흔적이 남은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지요. 이야기는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지는 내재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며, 타당성을 지닌 신비한 것으로도 여겨져요. 이야기꾼의 흔적이 필연적으로 남아있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 그 사람만의 경험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시간, 먼 과거에서 현재로 불려 나온 기억들은 남수의 안에서 재차 경험되고 해석되었어요. 남수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거나 청중의 존재를 의식하는 일은 없지만,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 하나의 이야기로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이야기꾼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남수는 다시 살아낸 경험들을 우리에게 전부 전달하지는 않았지요. 떠오른 기억들의 의미를 남수가 직접 해석해야 했던 것처럼요. 독자가 도달할 수 없는 곳, 타인의 내면이라는 먼 곳에서 형성된 이야기를 접하게 될 때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독자의 몫으로 남게 됩니다. 남수의 이야기에는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어서, 독자는 어쩔 수 없이 그러나 기꺼이 공백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우기 시작해요. 남수의 경험은 남수의 것으로 남겨둔 채 독자적인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남수로부터 독자에게 전해진 이야기는 다시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흔적이 남은 이야기로 재탄생할 수도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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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서 남수는 걷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때 마지막 문장이 특히 놀랍다고 생각했어요. ‘가로등이 없으면 내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을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고 하지요. 남수는 그런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고요. 여기서 저를 사로잡은 부분은 ‘가로등이 없으면’ 이란 표현입니다. 작가님은 가로등이 없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지요. 바로 아래 발자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새까만 어둠, 그리고 그런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을 동시에 부각시키는 표현입니다. 그저 가로등 불빛 아래를 걸었다고 말할 때보다도 어둠의 질감이 선명하게 그려져요.

어둠이 내려앉은 이미지는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을 거예요. 두 남학생이 마주할지 모르는, 여전히 편견과 차별이 팽배한 사회일 수도 있지요. 무지했던 과거, 무의식적으로 차별에 동조해온 남수 자신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고요. 죽은 동창이 겪어야 했을 무수한 일들이 자아내는 감정일지도 모르지요. 현재를 살면서도 먼 과거로부터 떠오른 기억들을 곱씹고, 마침내 어떤 이해에 도달했지만 남수의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그런 무거운 마음이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을 어둠’에 묻어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글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아요. 가로등, 어둠을 밝히는 빛의 이미지가 같은 문장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지요. 어둠은 분명 존재하지만 발을 들이지도 못할 정도로 두려운 장소, 미지의 공간은 아닙니다. 불빛에 의지해 얼마든지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길이지요. 여기서 가로등/불빛은 어둠이 그랬듯 여러 의미로 생각될 수 있을 거예요. 남수의 시대착오적 발언에 즉각적으로 저항한 어린 딸이나,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며 서로를 돌보는 학생들. 이들이 나아갈 미래는 남수와 동창들이 지나온 시간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도 포함될 수 있겠네요. 동창들과의 만남이 지나간 기억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남수보다 어린 세대와의 만남은 통념에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었지요. 이들은 남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남수와 다른 시대를 살아가게 될 테지요. 그러므로 이들의 존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다시 먼 곳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예감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발톱 타투>는, 남수라는 인물의 변화를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지요. 남수가 멀리서 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를 기다립니다. 충분히 듣고, 살아가고, 생각하고, 마침내 변할 수 있도록요. 저는 이 글에서 너그러운 시선을 감지했고, 기억을 해석하는 작업이 한 인물에게 미치는 영향을 지켜보았어요. 제가 눈여겨 보거나 느낀 것들이 다른 독자분들의 감상과 동일하지는 않겠지요. <발톱 타투>를 읽는 독자들은 저마다의 경험에 기대 각자의 발견을 할 테니까요. 고유한 깊이를 가진 이 이야기가 어떻게 기억되고 또 어떤 이야기로 전해질 수 있을까요. 그런 막연하지만 즐거운 상상을 하며 재차 이 이야기를 마음에 그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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