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네의 운명, 선택, 그리고 명예 비평

대상작품: 헬레네 (작가: 목단우, 작품정보)
리뷰어: 드리민, 6월 30일, 조회 30

아폴로도로스의 『도서관』 「요약」에 따르면, 트로이아 전쟁은 신들의 왕 제우스가 자신의 반신 딸인 헬레네가 유명해지도록, 혹은 반신 영웅들의 위상이 높아지도록 계획하여 벌어졌다고 전해집니다. 트로이아 전쟁에 참여하여 죽음을 맞이하든,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든, 트로이아 전쟁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모두 제우스의 계획에 따라 유명해지고 위상이 높아질 존재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다양한 신화 작가들이 남긴 원전들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고, 그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화와 비극 작품들을 모두 통틀었을 때 생각보다 많은 여성 인물이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간(혹은 반신) 여성을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헬레네를 선택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을 파멸로 몰아넣고 트로이아를 멸망시킨 전쟁의 원흉,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가장 아름다운 인간 여성’으로 지목한 여자. 우리는 그녀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헬레네는 제우스와 레다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폴로도로스, 휘기누스 등의 작가와 서사시 『퀴프리아』에 따르면 헬레네는 제우스와 네메시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전해집니다. 네메시스는 복수의 여신입니다. 정확하게는 범죄에 대한 복수이자 보복이며,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지나치게 행복이나 행운이 많은 자에게 불행을 분배하는 여신입니다. 헬레네가 불행을 분배하는 여신의 딸이라는 것은, 트로이아 전쟁의 결을 생각하면 꽤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건 신들의 시점이고, 신들의 이러한 계획과 내막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시점에선 어떨까요? 파리스는 자신의 선택이 전쟁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파리스 그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트로이아를 멸망시킬 아이로 예언되어 있었지만,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죠. 헬레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우스의 딸이자 무시무시한 네메시스의 딸로도 여겨지는 그녀이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설령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려는 아버지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고 한들, 그녀가 그저 운명과 에로스의 화살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인 꼭두각시라면 그 명예가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명예는 스스로 쟁취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신화 속 등장인물들이 하는 행동이나 사고에서 어디까지가 신들이 분배한 운명이고, 어디까지가 개인의 자유의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명예만큼은, 자유의지의 영역에 있지 않을까요?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참가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설령 본인이 직접 듣지는 못하였더라도, 어머니인 테티스가 출전과 여러 번의 죽을 운명을 막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전장으로 나섰고 명예롭게 이름을 남기며 죽었습니다.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들 속에서 명예로움을 추구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목단우 작가님의 <헬레네>는 어떤가요? 그녀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참극을 비웃습니다. 그 전쟁 안에서 죽고 죽이는 모든 이들을 제물로 삼아 신들에게 거대한 오락판으로 바칩니다. 실제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신들은 영웅들의 처우를 놓고 서로 대적하기도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보고 웃으며 연회를 즐기기도 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간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불멸하며 행복을 만끽하는 그들과 필멸의 고통이 가득한 삶을 사는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신들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동시에 호의를 베풀기도 하지요. 그런 신들에게 트로이아 전쟁은 커다란 유희인 것입니다. 어쩌면 이 전장을 신들에게 바친다는 헬레네의 선언까지 포함해서요.

<헬레네>에서 그녀가 기원한 대로, 그녀의 이야기는 전장에서 죽어가는 이들 못지않게 오랫동안 각인되었고 세상에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제우스가 약속한 헬레네의 유명함이자, 반신 영웅으로서의 명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운명이지만, 동시에 헬레네가 선택한 자유의지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다르게 설명을 해보죠. 파리스를 본 순간 그녀의 심장에 에로스의 화살이 박힌 것은 운명입니다. 하지만 파리스를 따라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오히려 파리스를 스파르타에 머물게 하며 그 안에서 치정극을 벌일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파리스는 트로이아를 멸망시킬 존재이며, 트로이아 전쟁은 신들의 의도대로 일어났을 것입니다. 헬레네도 그 안에서 아버지 제우스가 약속한 명예를 어떤 형태로든 얻었겠지요. 파리스를 따라 트로이아로 향한다는 선택을 한 것은 헬레네 본인입니다. 목단우 작가님의 <헬레네>에서는 이 부분을 분명히 합니다. 헬레네는 파리스를 선택했고, 두근대는 심장이 가리키는 충만함과 우월감과 오만과 모험심의 길을 따라갑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증오심을 내보이는 전장 한복판에서도, 그녀의 심장은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고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에 따르면 헬레네는 하늘로 올라가 신으로 숭배받는다고 합니다. 앞서 말했듯 신과 인간은 불멸성과 필멸성, 행복과 고통으로 대조되는 존재입니다. <헬레네>에서 그녀는 신들에게 전쟁을 오락판으로 바치면서도, 그 안에서 죽어가는 남자들의 모습에 즐거워하며 자신의 신도로 삼습니다. 인간들의 고통을 즐거운 유희로 삼으며 그들의 숭배받는 헬레네. 이러한 모습은 그녀에게 깃든 또 다른 운명과 명예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오랜만에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작품이 나왔기에, 즐겁게 읽은 것 같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조각조각을 나눠서 분석하니, 여러 신화 작품에서 나온 장면들의 변주와 그들을 한곳에 모아 나오는 화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화의 멋진 변주를 보여주신 목단우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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