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중, 하로 나눠진 이야기는 각 편마다 분량이 적지 않은데다 처음부터 세계관에 빠져들어 읽기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읽으면 입체적인 인물과 반전, 그리고 앞서 깔아 놓은 복선이 맞물려 대단원에서 터뜨려지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아기자기한 도입부에서는 생각치도 못했던 결말을요.
라임이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결말은 그레이의 배신보다 충격적이었습니다. 그전까지 라임의 지나치게 순수한 마음에 위화감을 느꼈었는데, 홀로 그 섬에서 심적 육체적 고통을 끌어안고 기약없이 기다렸을 생각을 하니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라임의 최후를 보여주기 위해 등장했던 율은 조금 의외긴했지만, 그레이의 대행자로서, 살아남은 섬사람들의 대표로서, 라임과 섬의 최후를 지켜보고 배를 타고 떠나는 율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레이와 라임의 로맨스를 암시하는 듯한 전개라 해피엔딩을 예상했는데, 그레이의 비겁한 모습을 통해 인간의 한계점을 포장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그려낸 점이 좋았습니다. 모두가 영웅인 건 아니니까요. 시련과 마주하기보단 도망치고 싶은, 사람의 나약하지만 인간적인 부분을 그려내는 게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
전반적으로 독특한 설정과 분위기가 매력적이지만, 중간에 늘어져서 긴장감도 떨어지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도 부족하지 않았나 해요. 큰따옴표까지 없으니 매끄럽게 읽어 나가기가 조금 힘들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모쪼록 초중간에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읽으셔서 이 작품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