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체, 혹은 고백체?의 소설은 읽기 쉽지 않습니다. 대개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친절하게 나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요. 꼭꼭 곱씹어야 찰기가 느껴지는 잡곡밥이라 해야 할까… 어떤 내용일까를, 서술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와 사건을 떠올리며 읽어야만 합니다. 이 작품이 그러합니다.
솔직히 이 소설이 맛있다 하긴 어렵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뒤로하며 씁쓸한,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작가님의 안배겠지만 첫 문단의 ‘만남’은 따뜻합니다. 주인공인 해선의 엄마는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조카 둘을 품고, 어린 해선은 수희 언니와 수애라는 뜻밖의 자매가 생깁니다. 하지만 뒷 내용이 따라 따뜻하진 않지요. 감동적인 뒷내용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해선이 훗날 고백하길 그들 사이에는 이미 그어졌고, 앞으로도 그어가야만 할 선이 존재했었다고 기억하는 듯한 묘사가 어쩌면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선의 남편인 영진은 수애의 애인이었습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지만 동생의 애인과 잠자리를 가졌고, 결혼까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뺐은 셈이 됩니다. 그리고 수희 언니의 남편과는 묻지마- 여행에서 우연히, 상대로 만납니다. 결과적으로는 관계하지 않았다지만 그 사건으로 의도치 않게 중간에 빠지지 않았다면- 우린 이럴때 ‘불을 보듯 뻔하다’는 표현을 쓰지요. 그런 그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입니다. 대놓고 헤픈 여자로 그려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일견 소심하고 조심성있는 보통의 여성으로 그리는 것 같으면서도 그와는 반대되는 무심함, 이기심, 자기합리화를 나름 일관성있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평범하게 복잡하고, 이기적인 캐릭터입니다. 수애에게 미안해 하면서도, 수희에게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마치 자신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제3자인 것처럼 담담한 척 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요. 여기서 삿된 말로 아랫도리 사정이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성품과 성욕은 별개라는 말, 인간이 아무리 점잖은 척해도 욕망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대놓고 탐하든지 그렇지 않은 척 은근히 바라든지의 차이일 뿐입니다. 어떤 분은 ‘성욕’이란 단어에서 부터 혐오스럽다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엄연히 인간이라면, 특히 작가라면 도외시해선 안될 그것입니다. 인간사를 관통하는 낯부끄러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를, 해선을 욕할 수 있을까요? 수애의 애인과 잠자리를 하게됐던 과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없습니다. 사실은 이랬다. 거기엔 이런 사정이 있었다 같은 변명을 할 법도 한데 말이죠. 그럴듯하게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흐름을 묘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중간 생략. 어찌보면 쿨하기까지 하달까요. 얼마든지 날 욕해라 같은 느낌이라면 너무 나간 걸까요? 난교파티라 회상하면서도 그 자신도 휩쓸려 동참할 뻔했던 그날의 사건에 대해 해선은… 만약 비밀이 지켜진다면 당신은? 이라고 되묻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낯선 장소, 뜻밖의 첫 눈… 가을의 끝자락을 하얗게 뒤덮는 아름다운 풍경은 해선에게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은 수희 부부의 어린 딸, 연우를 데리고 우연히? 다시 찾은 그곳에서- 평생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겼던 ‘행복’을 문득 느껴버리고는 ‘섬뜩’했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해선의 마지막 독백을 듣게 되지요.
…..뭐, 연우 너라고 우리와 다르겠느냐마는.
처음에는, 해선이 참 일관성있게 끝까지 나쁜 캐릭터라 생각했습니다. 어린 연우에게 저주를 내리는 가식적인 어른같았습니다. 아니 틀렸어. ‘우리’라니? 당신만 그래. 라며 핀잔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읽으면서 곱씹게 되더군요.
인간은 모든 순간, 항상 옳고 가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척하지만 감정과 욕망을 더 많이 따를 때가 훨씬 많은 존재지요… 해선이 했던 선택들을 비난하기엔, 그저 수 많은 인간 군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하여, 나쁜 주인공을 욕하게 하고서, 사실은 모두 거기서 거기, 오십보 백보는 아닐까 되묻고 있는 이야기는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때로 어떤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는 것이 옳다 싶기도 합니다. 해선이 자기 마음 편하자고 털어놓은 이야기 탓에 수희의 마지막은 지옥 같았을 거라… 안타까움을 가져봅니다. 절대 제가 어떤 엉큼한? 비밀이 있다는 게 아니예요. ㅎㅎ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