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에 관하여 – 복수를 원하나?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눈물을 마시는 새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살라만더, 1월 4일, 조회 34

1. 이영도의 소설은 모두 정신분석 상담의 틀로 볼 수 있다.

2. 눈물을 마시는 새 또한 한 개인이 어떻게 복수심을 버리고 그 앞으로 나아가는지를 정신분석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어떤 정신분석적 틀에서 보아야 하는가? 그 틀을 알기 위해서 몇가지 정신분석적 주제를 이야기 하고 가도록 하자.

3. 정신분석의 대표 주제 : 부친 살해 – 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https://namu.wiki/w/%EC%98%A4%EC%9D%B4%EB%94%94%ED%91%B8%EC%8A%A4%20%EC%BD%A4%ED%94%8C%EB%A0%89%EC%8A%A4 (감사합니다 나무위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라는 것이 있다. 남자 아이는 엄마와 가까이 찰떡같이 붙어있기를 바라고 또 그것을 방해하는 아빠를 미워한다는 것이다. 혹은 그러한 틀이다. 여자 아이는 일렉트라 콤플렉스 라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경우는 아빠를 사랑하고 엄마를 미워하는게 것이다. – 프로이트는 남자 아이의 이런 어머니 사랑이 아버지에 의해서 적절히 좌절되었을 때 건강한 자아가 발달한다고 보았다.*중요*

누군가는 없다고 하겠지만 정신분석을 한 내 개인적 경험으로 보았을때 이것은 분명히 존재하며(기억하지 못하는 저 의식 너머에 비록 약간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지라도.. 나 같은 경우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의 행동방식의 무의식적인 그리고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정신분석이다. 그렇다면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어떤 형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타난다고 보여지는가?

4. 케이건 드라카 : 쌍신검을 들고 아내의 복수를 하는 나가 살육자.

사람은 성장한다. 아주 어린 아기시절부터 할아버지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어떻게 되는가? 어린시절 어머니를 좋아하는것이 적절히 제한되고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곳에 찾고 그렇게 발달한다고 볼 수 있다. 아기가 좋아하는 엄마의 모습은 사실 엄마의 본 모습이라기 보다도 일부러 아기와 같이 이야기하고 놀기 위해 퇴행 혹은 유아기적 전이를 한 엄마의 모습이다. 이러한 아기(나)는 현실(아빠)과 직면하면서 유아기적 모습(엄마)을 극복하게 된다. 이런 구도를 케이건에게 대입시켜 보면 꽤 그럴싸한 해석이 나타난다.

유아적인 모습의 케이건(나)은 나쁜 나가들의 속임수에 넘어가(현실) 미워한 자신의 누이(엄마1)를 배신하게 되고 사랑하는 자신의 부인(엄마2)도 잃게 된다.

전쟁의 현실이다. 어설픈 동정론이나 이상론은 설 곳이 없다. 그러나 케이건은 평화를 원했고 결과적으로 사랑했던 여성들을 잃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케이건에게는 무엇을 남길까? 그것은 ‘퓨처워커’에서도 말한적있는 ‘트라우마'(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 :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실제로 수반한다.)를 유발할만 하다. 케이건이 트라우마 환자라는 묘사는 작품 곳곳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1)친절이 적절할 때 필요한 만큼 계량되어 나타난다거나 2)두 가지 이상의 생각이나 역할을 동시에 하기 힘들다거나(나도 그랬다.) 3) 혹은 한 겨울철에 개를 끌고 썰매를 타러 가서 자신을 테스트 한다던가 하는 자기고문 등이 있다. 자기 자신이 살아남지 말고 벌을 받았어야 한다는 죄책감이 나타난 장면이다. 그러나 죽지 못하고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그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수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신의 힘이 주어졌으니 얼마나 복수를 하고 싶겠는가? 그런데 원한으로 인한 트라우마 환자가 복수를 한다고 해서 트라우마가 없어질까? 성폭행 트라우마 환자들이 성폭행범이 처벌받는다고 해서 트라우마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나쁜 기억이 사라질리 만무하다.(무고한 범죄의 피해자 분들을 모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편한 분이 있으셨다면 제 글 능력이 없는 것이니 저를 욕하십시오..)  트라우마는 그런것이다. 환자들은 계속해서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야 한다. 신의 힘을 얻는다 한들 행복할 리 없다. 신의 힘을 가진 환자일 뿐이다. 그런데 환자는 케이건 뿐일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는 인물은 또 있다.

5. 갈로텍 : 케이건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

하텐그라쥬에 거주하는 남성 나가 수호자이다. 이 나가는 어떻게 뒤틀려 있는가? 나무위키의 설명을 빌리자면

22세에 적출식을 치르고, 누이 세페린과의 연결을 완전히 잃었다는 실의에 빠져 하텐그라쥬를 나와서 무작정 방랑한다. 얼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한계선 근처에서 헤매다가 우연히 무뢰배에게 쫓기고 있던 늙은 인간 군령자를 만나, 그 자를 받아들이고 군령자가 된다. 자기 입으론 지식을 원했다고 하지만, 군령자가 되면 세페린의 영혼을 받아들여 한 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여동생을 여신으로, 자신은 그런 여신을 모시는 제단이 되어 하나가 되고 싶다는 뒤틀린욕망이 있었다. : 거의 케이건과 같은 묘사라고 할만큼 갈로텍(나) – 나가살육자(현실) – 누이(엄마)의 구도가 그려진다.

 반면 트라우마의 증세는 달라보인다. 다중인격(군령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을 신뢰를 주지 않고 도구처럼 다루는 증세 또한 나타나고 있다. 퓨처워커에서도 트라우마 환자들이 보였던 증세다.

6. 그러나 그 둘의 유아기적 환상은 지속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케이건의 누이의 제국은 붕괴했고, 여름은 살해당했다. 이런 케이건에게 남은건 나가에 대한 분노뿐이다. 갈로텍의 누이는 두 번 살해당했다. 이런 갈로텍에게 남은건 나가살육자(인간)에 대한 분노뿐이다. 그런 둘이서 결국 소설의 말미에서 마주치고야 만다.

7. 이런 트라우마의 환자들은 어떻게 치료하는가? : 있는 그대로 대면하기 – 주퀘도의 회군.

잠시 주퀘도 이야기를 하자. 군령자의 몸 안에 있던 주퀘도는 자신의 마지막 실패였던 유료도로당 공략에 매우 집착하고 있으며, 언제든 복수할 기회만을 생각하고 있다. (고마워요 나무위키) 그리고 결국에는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이후 갈로텍의 반응은 어떠한가? 자신의 상처이자 숙원이었던 함락이후에 과연 갈로텍은 기뻐했을까? 소설속 묘사에서는 영혼이 빠져나간듯하다고 했다. 주퀘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나는 그 소중한 실패를 망쳐버렸다. 스스로 구축한 작품을 망쳐버렸지.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돌아보지 않고 고쳐버린다면 스스로의 상처가 사라질 줄 알았던 것이다. 주퀘도는 자신의 과거가 패배로 마무리 되었음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이렇게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는것 이것이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시작이다. – https://brunch.co.kr/@withly/192(참고)

8. 케이건은 말한다. – 복수를 원하나?

부부상담이라는 장면을 관찰해보면 유난히 가정환경이 ‘비슷한’ 부부들이 많다. 아니 거의 꼭 그래야만 부부가 되는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가정환경(?) 이 비슷한 케이건과 갈로텍이 소설의 말미에 만나게 된다. 갈로텍은 이 시점에서 ‘아직’ 변하지 않았지만 케이건은 ‘변했다.’ 왜? ‘나늬’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늬를 만나고 케이건은 아주 조금이지만 ‘감정’을 찾게 된다. 변한것이다. 자신의 복수에 눈이 멀어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 ‘나늬’를 잊고 살았던 케이건이 나늬를 만나고 감정을 되찾게 된다. 그러면 다시 묻고자 한다. ‘나늬’란 무엇인가?

위에서 말했듯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는 나-엄마-아빠 라는 도식이 등장한다. 아빠라는 현실이 적절히 극복되어야만 엄마에게 붙어있고자 하는 유치한 혹은 어린시절의 내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늬는 달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쫓아가야 한다. 마치 엄마에게 가듯이. 그렇게 나늬를 다시 만나과 케이건은 감정을 되찾게 된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엄마 : 나늬는 사실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갈로텍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질문한다.  – 복수를 원하나?

9. ‘복수’란 무엇인가?

상담자가 내담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때 상담의 치유효과가 높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내담자가 겪는 고통을 겪어 본적이 있는 상담자는 진심으로 내담자에게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케이건은 갈로텍에게 복수를 원하는가를 물어보았다. 정말로 자신을 죽이라는 말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복수’라는 말을 제대로 실천하신 분이 계셨다.(키선장니뮤..) ‘복수’란 상담에서 말하는 내담자가 표현하는 것을 거울처럼 돌려다 주는 ‘반영’이다. 라고 이전 글에서 주장했었다. 케이건은 친절하게 갈로텍에게 물어본것이다.

‘나도 너와 같은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슬픔과 같이 살아가려고 한다. 갈로텍 너의 슬픔을 고치고 싶은거니? 바꾸고 싶은거니? 너의 이야기를 해다오.’

그리고 갈로텍은 대답한것이다.

0. 눈물을 마시는 새. : 눈물을 마시면 죽소.

우리는 쉽게 공감을 이야기 하지만 막상 공감이 쉽지는 않다. 내가 다니는 병원의 정신과 의사는 내가 ‘공감을 하는게 싫어요.’ 라고 하자 ‘공감하는거에 꼭 좋은 것만 있는게 아니니깐요.’ 라고 말했다. 남의 슬픔을 공감하게 되면 내가 슬퍼지게 된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공감해주면 같이 눈물을 흘리게 된다. 내담자는 그 이후 나아질지 몰라도 같이 눈물을 흘려준 상담자는 정말로 ‘죽을 수 있다’ (https://brunch.co.kr/@modiano99/983 – 정신과 의사의 자살률) 둘이 같은 상처를 가지고 같이 공감을 한 후 .. 그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라기처럼 하나가 되었을까? 군령자처럼 하나가 되었을까? 아마 바라기와 군령자가 상징하듯 같이 한 몸이 되었을거 같다. 그리고 한 비석의 글귀를 바꾸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은 서로의 눈물을 마셔 주기에… 미움으로 가득차 있지 않다고.. 사람의 마음은 xx로.. 가득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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