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불사자 관리센터>는 ‘좀비가 민원을 넣는다’라는 발상이 흥미로워서 바로 클릭해서 단숨에 읽었다. 좀비를 다룬 소설은 대체로 좀비 사태가 발발하는 ‘그 순간’을 다루고 있거나, 좀비 사태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2가지 서사로 나뉘는데 이 소설은 ‘후자’에 해당한다. 좀비 바이러스로 인하여 전 세계 곳곳에서 잔혹한 전쟁이 벌어지고 20년이 흐른 시점을 ’현재‘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 사회에서는 좀비라는 용어가 금기시 되며 ’불사자‘라는 어휘로 그들을 지칭한다. 그들도 한때 인간이었고, 우리의가족이었던 만큼 무조건적으로 죽이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공감대가 생기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되면 ’격리처분‘하기로 하고 불사자 관리센터를 설립한 것이다. 주인공 고수는 마평구청 ’불사자관리과‘ 내 불사자안전팀 소속으로 불사자 관리센터를 관리한다. 그런 고수에게 ’민원‘을 넣은 이는 불사자 중 보기 드물게 의식을 갖고 있는 미주다. 인터넷 방송인으로 활동하던 중 길거리에서 팔을 물려 불사자가 된 그녀는 본인도 인권이 있으니 ’자유‘를 달라고 주장한다. 민원 처리를 거부하기로 잠정 결론 내던 그때, 불사자 관리 센터 자체를 없애달라는 민원도 들어온다. 마평구청 외 전국 곳곳에 설치된 불사자 관리센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전직 군인이다. 이렇듯 불사자의 ‘권리’를 존중하려는 측과 불사자는 즉살해야 한다는 측이 맞서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충분히 말이 되는 상황이라 생각될 만큼 양 측의 입장이 잘 표현되어서다.
단지 여기서 멈추었다면 소설보다는 ‘사회적 시선’을 담은 이야기로 그쳤을 텐데 불사자의 인권을 주장하던 미주가 탈출하면서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불행히도 미주를 관리해야 마땅한 불사자 관리센터의 장례팀장 기태가 그녀의 팬이었던 터라 함께 탈출한 거다. 나는 그 기태란 자가 주인공에게 “저는 이 말만 하고 싶어요. 미주는 다른 불사자와 달라요. 미주는 우리를 해치지 않아요”라고 말할 때 실소했는데 “우리 개는 물지 않아요”라거나 “우리 애는 착해요, 친구를 잘못 만났을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무책임한 자들이 떠올라서다. 그 누구든 권리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권리로 인하여 그가 누군가를 해치게 된다면,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의무와 책임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섣불리 저런 말을 하지 못한다. 나는 방종한 자유를 몹시도 싫어한다.
바로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이 좋았다.
안타깝지만 누군가를 해할 위험이 있는 자는 ‘자유’를 얻기 어렵다. 좀비의 문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돌변할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어서다. 심지어 의식이 있더라도 충동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인권, 권리, 자유라는 말은 결코 얄팍하게 쓰여서는 안 된다. 읽는 사람에 따라 이 소설의 결말은 다르게 읽힐 거라 생각한다. 나는 사회적으로는 법망을 벗어나 방종한 자유를 얻으려던 자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결말’이라 보았다.
동시에 인간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감염자가 마지막 소망을 이루고자 발악하다 맞이한 ‘서글픈 결말‘으로 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까지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다. 병동 안에는 알코올 반입이 허용되지 않았고, 할머니는 결국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지 못하고 가셨다. 우리 가족은 한동안 후회했다. 어떻게든 맥주를 한번이라도 드시게 할 걸… 하고 가슴 아파했다. 그럼에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특히나 타인을 해칠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로 비이성적인 탈주를 감행한 미주가 바란 것은 더 ’어쩔 수 없는 바람‘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서글프나 그래야 ’마땅한‘ 결말이었다. 나는 마지막 문장들에 잠시 머물렀다. 그 순간에 미주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지 생각했다. 그녀는 운전대를 놓지 못했을 것이다. 내달리며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어쩌면 설핏 웃었을 거다. 의식이 말짱한 상태로 건물에 갇혀 말라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보다 어쩌면 이 편이 더 인간다운 결말이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