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진보람(리체르카) 작가의 장편 연재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의 전자책 출간본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이후 언급하는 내용 및 인용 중 연재분과 상이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파랑’이라고 하는 단어는 환상적이고 매력적이며, 안정을 가져다주고 꿈을 꾸게 한다.
-미셸 파스투로, 『파랑의 역사』, 298쪽
‘파랑’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을의 한가운데,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어떤 방해물도 없이 수평선까지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 청색 계열을 특징적으로 쓰는 간판이나 물건, 애플리케이션 아이콘 등이 생각난다. 무더운 여름, 푸른색 이미지를 보면 시원하게 열감이 식는 기분이 든다. 이처럼 색은 사람의 감정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디자인의 면에서 빨강은 뜨거움, 파랑은 차가움을 나타내는 가장 직관적인 색이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을까.
대부분 개념에는 ‘역사성’이 있다. 언어, 문화, 사상, 철학의 부분 또는 전부가 그러했듯 색 또한 시간에 따라 명백한 기능의 변화를 겪었다. 그중 파랑은 다른 색에 비해 사람들의 눈에 늦게 인식되었지만, 현재는 가장 선호된다. 지금 우리가 아는 파랑은 그 역사의 극히 일부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는 파란색이 따뜻한 색”이었으며 때로는 “모든 색깔 중에서 가장 따뜻한 색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1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파랑의 온도는 17세기부터 내려갔으며 완전히 차가운 색으로 인식된 건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진보람 작가의 장편 연재소설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는 수 세기 동안 역사가 기록해 온 파랑의 이미지 중 ‘신성성’을 극대화해 활용한 작품이다. 실제로 12세기 전반, 청색은 “단독으로 성모 마리아가 입는 상복의 색깔을 차지”2할 정도로 신학적 위상이 높았다. 성화(聖畫), 즉 성스러운 그림을 통해 악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중세 시대풍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판타지 소설은 익숙하던 길거리에서 갑자기 수상한 소문을 지닌 예술가들의 탑으로 이끌려 들어간 화가 ‘슐러’를 주인공으로 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길거리 생활을 오래 하며 늘 배를 곯았던 탓에 제대로 된 종이에 그림 하나 그려보지 못한 슐러는 가능성 있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니르젠베르크 저택 주인의 눈에 들어 갑자기 상상도 할 수 없던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 찬바람을 맞으며 다리 밑 맨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익숙했던 그에게 주어진 건 뜻밖의 따듯한 방과 고급 미술 재료들. 대대로 예술가들을 지원해 왔다는 이 저택의 주인은 슐러에게 그저 재능을 키우는 데에만 마음을 쓰라고 넌지시 귀띔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루아침에 생활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슐러는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저택에는 수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저택에 들어간 수많은 예술가 중 유독 화가들만 다시 세상의 빛을 보는 일 없이 홀연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다 해도 평생에 한 번도 저택의 밖에 나갈 수 없도록 사람을 묶어두는 것은 지독한 감금이다. 어째서 모든 예술가에게 관대한 니르젠베르크 저택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는 자취를 감추는 것일까.
나는 납치되었다.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의 주인공 슐러는 예기치 못하게 벌어진 인생의 반전을 겪는다. 누구나 한 번쯤 당첨되고 싶어 하는 로또로 수도 중심부의 근사한 집 한 채도 못 사는 게 현실이니 슐러가 받게 된 축복은 그것 이상의 행복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저 비상한 안목을 지닌 후원자의 눈에 들었다는 이유로 번듯한 집과 끊이지 않는 식사, 마음껏 그림을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을 얻게 된 슐러는 길거리를 벗어나 니르젠베르크 저택에서 지낸다.
이 소설은 슐러가 불안하지만, 가장 익숙했던 다리 밑에서 안전하지만 가장 낯선 저택으로 생활 반경을 옮기며 시작된다. 저택의 바깥 세계에서 그저 익명으로 지내던 슐러에게 그곳으로의 초대는 반갑지만 어딘지 껄끄럽다. 마음껏 그림을 배울 수 있어 좋지만, 막상 길거리에서 그가 살아 온 방식은 새로움을 창조해야 하는 예술가들이 보기에는 도둑질에 가깝다. 그는 공격적으로 남의 것을 보고 배운다. 길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웠던 도적의 기술이 예술에서는 무례함이 되고 만다. 저택에서 살게 된 초기의 슐러는 일반적인 삶을 살아본 경험이 없어 종종 실례를 범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슐러가 저택의 외부인이었음을 다양한 사례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슐러는 저도 모르게 그림의 재능을 드러내고, 선생의 질투심을 산다.
이렇게 외부인에 가까웠던 슐러는 점점 저택의 규율과 예절을 익힌다. 작가는 슐러와 독자가 이 예상치 못한 삶의 전환에 서서히 적응하도록 단계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한 계단, 한 계단을 내려가듯, 저택의 소문과 슐러에게 언뜻언뜻 비치는 비현실적인 현상들은 끝내 그곳의 경악스러운 진실까지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 저택에는 다니면 안 되는 길과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 알아서는 안 되는 장소가 있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방식으로 슐러는 동행자 디트마일로부터 저택에 관한 정보를 얻는다. 디트마일은 저택의 일꾼으로 생활하며 몸에 밴 예의를 보이지만, 한편의 직설적인 언행으로 슐러의 친구이자 조력자 역할을 해낸다. 디트마일의 입장에서 슐러는 윗선의 명을 받아 지켜야 할 자원이다. 하지만 그는 슐러의 인간적인 면모와 예술적 가능성, 정신적, 기술적 성장에 마음이 동한다. 공적인 일로 만난 둘은 어느새 각별한 사이가 된다.
슐러는 디트마일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한편, 저택의 심부로 이동하며 환상적이고도 두려운, 심지어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그곳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저택의 주인 칼스텐의 쌍둥이 동생 엘렌을 만난다. 이 소설에서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인물이 바로 그녀다. 그녀는 사실상 이 소설의 환상성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다. 니르젠베르크 저택이 현실적인 공간으로 느껴지다가도 그녀가 등장하면 전혀 다른 신비함과 기묘함이 순식간에 그곳을 가득 채운다.
처음 슐러는 엘렌이 ‘백치’라고 소개받는다. 그러나 그녀를 단순히 기억과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자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쉴 새 없이 벌어진다. 슐러는 엘렌을 만날 때마다 잔인한 환각을 보거나 알 수 없는 현상을 겪지만, 디트마일을 포함한 저택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듯하다. 이후 밝혀지지만, 엘렌은 과거에 큰 힘으로 주변을 장악했던 동쪽 탑의 마녀가 정신을 지배하는 인물이다. 마녀의 존재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사람. 그래서 일반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사람. 엘렌은 사실상 이 소설의 중심이다. 마녀가 사라져야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슐러의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종다양한 인간관계가 발전해 가는 와중에도 슐러가 저택에 들어온 이유는 변하지 않는다. 과거에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쾌락을 채우던 마녀가 있었다. 그녀의 힘은 봉인되었지만, 언제 다시 동쪽 탑에서 탈출할지 모르는 상태다. 니르젠베르크 저택의 사람들은 그 탑의 마녀를 완벽히 잠재우기 위해 능력 있는 화가들을 키웠다. 그러나 마녀의 마법에 면역이 없던 탓에 다들 저주나 병에 걸렸던 것처럼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러나 슐러는 조금 다르다. 그는 마녀의 능력에 저항할 줄 안다.
저택의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는 임무에 화가들을 동원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지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에 만족하던 슐러가 세상을 구하기 위한 계획에 차출된 자신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다. 그는 혼란스러워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죽음의 위기는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인다.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는 그가 타인의 것을 훔치며 살아야 했던 노숙자에서 숙련된 화가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지만, 끝내 탑으로 향하기까지의 여정을 구체적으로 담은 소설이다. ‘슐러’라는 인물과 ‘저택’이라는 공간, ‘마녀’라는 사건이 정통 판타지라는 장르와 한데 어우러져 만드는 색채는 그야말로 다채롭다.
예측이 쉽고 단순한 전개에 독자가 지루하지 않도록 물감을 만드는 염료의 배분과 사용, 미술 도구의 사용법 등을 상세히 다룬 것도 이 소설을 읽는 하나의 재미 요소다. 판타지 세계관임에도 마법으로 직접 마녀를 물리치는 대신 화가로서 성화로 봉한다거나, 마력을 수련하기보다는 작화 기술을 갈고닦는 등의 설정은 슐러가 처음부터 마녀의 존재를 아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소설 자체를 흥미롭게 한다. 밑바닥부터 그림을 배워 온 슐러가 어떻게 마녀로부터 세상을 구하는지의 기본적인 영웅담 구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새로움을 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슐러는 마녀의 힘을 완전히 소멸하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소중한 사람을 보내야 했다. 마법에 묶여 이승에서 백 년 동안 떠나지 못했던 저택의 사람들은 그것이 풀리자마자 자유로운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는 비로소 찾아온 해방이지만, 갓 저택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는 슐러에게는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이 곁을 떠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마녀를 물리치는 데에서 끝났다면 이 소설은 해방감만을 주었겠지만, 독자들은 슐러와 디트마일의 이별을 보며 헤어짐의 슬픔까지 복합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 슐러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완수한다.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는 대부분의 판타지 영웅담이 그렇듯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다각도로 살핀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삶이 침해되어도 좋을까. 분명 그것은 아니다. 슐러는 처음에 자신의 인생이 마녀의 소멸을 위해 쓰여야만 한다는 데에 반감을 품었지만, 결국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가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알고 니르젠베르크 가문의 계획에 동참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녀의 힘이 슐러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나’와 나의 주변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작가는 슐러의 그 솔직한 감정을 건드려 그가 스스로 행동하게 한다. 물론 주변의 상황이 그를 영웅적으로 만들었겠지만, 탑에 가기로 마음을 정한 슐러는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적응하고 마녀를 물리치기 위한 힘을 기른다.
이 소설이 무작정 한 사람에게 세계를 구하라고 종용하지 않는 영웅담이기에 좋다. 니르젠베르크 저택의 사람들은 슐러에게 임무를 주는 한편, 필요한 자원과 공간을 마음껏 지원한다. 그들은 단지 슐러와 그의 세상이 위험에 처했음을 알린다. 그리고 그 위험의 근원을 소멸하는 과정을 온전히 한 사람이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그는 저택에서 삶을 의지한 친구 디트마일과 그림을 가르친 여러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마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럼 슐러가 영웅이 된 이후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보통의 화가로 남은 생을 산다. 그 대신 마녀를 무찔렀던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는다. 그것은 전설의 형태로 남는다. 바스틸라덴에 바치는 성화에 그가 붙인 제목은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그가 떠올릴 만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다.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는 보통의 사람을 단순히 영웅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평범했던 한 사람의 인생에 발생한 신기하고도 환상적인 사건의 회상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꾼 저택에서의 일을 잊지 않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도움과 가르침을 기억한다.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는 단순한 그림의 제목이 아니다. 슐러라는 이름의 생을 구성하던 색색의 물감들이 덧씌워져 완성된 성화다. 그 그림은 터져 나오려던 마녀의 힘을 봉했으며, 이승을 배회하던 이들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상처 입고 혼란스러웠으나 결국 그는 단 하나의 찬가를 완성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가까이서 곁을 지키는 어린 제자에게 변함없이 다정한 미소를 보낸다. 그 아이는 슐러가 “어지간한 자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삶을 택한 슐러는 그저 툴툴거리는 그 아이가 못내 사랑스러울 뿐이다. 어떤 것도 흔들지 못하는 단단한 마음으로 혼란함과 두려움을 파괴해 본 적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두가 귀엽게 느껴지리라. 그는 꿈과 같았던 삶의 조각들을 잊지 않고 그려낸다.
그리하여 완성된 이 그림의 노래를 찬가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