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좀비의 취급에 대한 소고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그날, 동좀하초 재배실에서 (작가: 담장, 작품정보)
리뷰어: 일월명, 23년 10월, 조회 146

작년 ZA 문학상 출품작 중에 위래 작가의 「지속 가능한 죽음으로부터」라는 작품이 있다. 좀비 팬데믹 사태 해결 후 에너지 문제 해결을 위해 좀비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거대 상조회사 래드캔과 좀비해방전선 간의 갈등으로 인한 에피소드를 그린 소설이다. 「그날, 동좀하초 재배실에서」를 읽으며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와 함께 이 소설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났다.

팬데믹 이전 작품들이 ‘나는 전설이다.’나 ‘28일 후’처럼 좀비의 확산으로 인한 문명의 몰락과 인류 멸망을 그렸다면, 세계가 생각보다 그렇게 쉽게 절단나진 않는다는 걸 모두가 체감한 최근의 좀비물은 보다 국지적인 규모로 창궐한 좀비를 격리하거나, 전 세계로 좀비가 퍼졌어도 어찌저찌 제압한 후 남은 좀비의 처우를 고민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런 요즘 좀비 장르물은 좀비 포스트 아포칼립스라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협적이지 않은 좀비와 공생할 수 있을까?

 

TRPG에서 통용되는 우스갯소리 중 이런 게 있다. “플레이어가 손쉽게 죽일 에너미가 필요하다면 나치 좀비를 써라.” 즉 그것을 죽이는 행위가 플레이어의 윤리를 전혀 위협하지 않을 만한 대상을 적으로 세우라는 거다. 여기서 작은 질문을 해보자. 나치를 죽이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건 이해가 간다 치고 좀비를 죽이는 것은 왜 정당한가, 혹은 왜 정당하게 느껴지는가. 노예들의 정신을 구속하는 내세의 형벌이었던 먼 과거부터 미디어 속 악역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좀비의 특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어 왔지만, ‘좀비’ 코드가 지니는 핵심은 간단히 간추릴 수 있을 테다. 식인종, 군중, 전염, 무엇보다 움직이는 시체라는 표현으로 말이다. 좀비의 본질은 ‘전염 가능성 있는 움직이는 식인종 시체 무리’다. 이 네 가지 특질이 사람과 좀비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우리는 ‘나’를 잡아먹으려는 괴물을, 말이 통하지 않는 커뮤니티를, 내 본질을 침해하는 것을 적으로 인식해 두려워하고 피한다. 상대가 산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은 윤리관을 마비시킨다. 무섭고 혐오스러운 비인간의 위협에서 나를 지키는 자기 보호. 좀비를 죽이는 행위는 그렇게 당위성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위협적이지 않은 좀비를 죽이는 건 정당한가? 가령 좀비가 사람을 먹지 않고 광합성이나 하고 있다면 어떤가? 개인행동을 하고 대화도 가능한 좀비에게 사람 너댓 명이 달려들어 잡는 그림은 어떻게 보이는가? 혹은 세상에 좀비가 딱 하나만 생기거나 남았다면 우리는 그걸 좀비로 보긴 해야 할까, 운이 지독하게 나쁜 희귀병 환자로 대우해야 할까?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의 좀비는 특수한 상황이 아닌 한 위협적이지 않다. 아포칼립스 당시 좀비를 제압 및 관리하는 효율적인 방법이 상용화된 이후를 그리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열병기를 내세운 강한 무력일 수도 있고 물리적‧사회적 격리처럼 온건한 방식이거나 좀비서 사람으로 되돌리는 ‘인도적인 해결책’일 수도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좀비가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에 이르러서도 좀비가 그 상태 그대로 한 장소서 사람과 동등하게 공존하는 경우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등장인물은 물론 작품을 읽는 독자와 때로는 작가마저 사람과 좀비 간 수직적 위계를 인지 및 내재화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작품 속 사회 전반의 분위기 역시 이러한 인식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 구도는 자기보호라는 명분을 잃었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혐오의 감정을 짚어낸다. 좀비는 더는 위협적이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혐오스럽다. 그렇기에 사람은 좀비와 공생할 수 없고 그러려 들지도 않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의 좀비는 인간의 공생자가 되지 못한다.

 

 

도구로서의 좀비, 사물로서의 인체, 그리고 자본주의

 

고로 좀비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좀비(혹은 좀비가 은유하는 것들)을 향한 혐오를 중점적으로 그려낸다. 대상을 향한 편견에서부터 그 수위가 높아지는 일반적인 혐오와 달리 좀비를 향한 혐오는 제노사이드서 시작해 차차 가라앉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이 좀비에게 가하는 각종 폭력적인 행위는 현실서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혐오적 차별과 같은 양상을 띈다.

「그날, 동좀하초 재배실에서」에서 그려지는 차별은 세련된 제노사이드(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더 적합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다. ‘동좀하초’라 불리는, 좀비를 숙주로 삼는 균사체를 키워 제약 및 의류산업을 하는 거대 기업, 그리고 그 기업에 힘을 보태는 직원과 소비자들이 이루는 인간 군중에 의해 좀비들은 개별적으로 구속되어 버섯 화분으로 쓰이다 소각된다. 장면 자체가 주는 그로테스크함은 작중 좀비가 얼마나 효율적인 방식으로 물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물화된 좀비’는 ‘물화된 인체’로도 볼 수 있다. 이야기 초반부에 좀비가 매우 무력하고 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에 괴물로서의 좀비보다 시체로서의 좀비가 더 부각된다. 좀비를 탈출시키려 재배실에 침입한 유가족들의 목적 역시 가족인 좀비의 인권을 위한 투쟁보단 망자의 시신 수습에 가깝다. 자신의 가족이었던 이가 기업에 의해 유린당하는 걸 납득할 수 없다는 그들의 주장과 죽은 좀비들로 사업하는 게 무슨 문제냐는 사측의 입장은 사람의 몸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인본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첨예한 대립의 연장이다. 이 소설서 좀비로 동좀하초를 재배해도 되느냐는 질문은 인간의 신체를 자본으로 치환할 수 있는 물질로 볼 것이냐는 질문과 같다.

앞서 짚었다시피 좀비 장르서 자본주의 담론이 나타나는 건 이 작품이 처음이 아니다. 사실 이건 「어둠의 맛」부터 계속 이어진 전통 있는 주제다. 그러나 이제는 좀비—소수자의 목소리조차 한 줄 실리지 않고 오직 사람의 목소리만 나오는 좀비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다분히 문제적인 현상이다.

 

 

내재적으로 아쉬운 지점들에 대해

 

「그날, 동좀하초 재배실에서」 작품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아쉬운 점이 많다.

우선 회사 바깥의 세계가 어떤 상황에 처해졌기에 좀비에게서 약과 섬유를 뽑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 동좀하초가 정확히 무엇을 위해 재배되는지도 모르고, 또 의식주가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좀비를 잡아 그 귀찮은 과정을 걸치면서까지 동좀하초 섬유를 뽑아야만 하는지도 의문스럽다. 섬유를 얻을 수단이 그것밖에 남지 않은 세계라면 좀비를 관리하는데 쓰이는 엄청난 기술력 역시 유지될 수 없을 만큼 문명이 무너졌지 않겠는가?

또한 앞서 짚은 문제점의 연장으로 등장인물들의 입장과 감정선이 불명확하고 급진적이다. 세계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기에 그 세계를 산 인물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추론하는 것 역시 힘들며, 그나마 힌트가 될 서술과 인물들의 대사들도 다소 두서없이 나열된다. 주인공의 경우 수애가 사망해 좀비가 되기 이전까지 자기 의견 없이 회사-자본주의의 입장의 대변자로만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다못해 주인공 개인이 아포칼립스 상황서 어떤 일을 겪었길래 그토록 철저한 자본의 부역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작중 보이는 몇몇 장면들은 가치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물화된 좀비의 모습을 그리는 장면이나 신체의 양분을 모두 빨아먹고 떨어진 균사체의 그로테스크한 모습 같은 부분은 작품이 나름의 독창성을 확보하게끔 한다. 이미지적으로 강렬한 소설이다.

 

예전에 비해 요즘 좀비의 취급은 점점 열악해져가는 추세다. 아마 한동안은 이런 흐름이 이어지지 않을까, 글을 마치며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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