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였어요….
분명 타임리프 태그를 보고 들어왔는데, 신들이 삶의 곳곳에 머물고 세상 또한 신의 섭리로 움직이는 세상에 푹 빠져서 홀라당 잊어 버렸지 뭡니까. 그래서 처자식을 때려 죽인 광인이 네메아의 사자를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엥? 하고 놀랐습니다. 어디에서도 하지 못한 자랑이지만 그리스로마신화 만화 세대인 제게 이건 이상한 일이었거든요. 그래도 글의 곳곳에 모르는 신의 이름이 잔뜩 나오는데, 분명 작가님이 더 잘 아실 테니 다른 판본인가 보다~ 하고 넘겼었습니다.
소개에서 내용을 너무 많이 얘기한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만, 글은 그보다 훨씬 더 길었습니다. 소개 마지막 줄에 괴물 히드라를 사랑한 소녀의 이야기라고 하기에 아~ 어디에도 갈 곳 없는 불쌍한 인간 소녀를 인간에게 배척받는 강력한 인외가 거두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이야기겠구나 지레 짐작했었는데요…
9개의 뱀머리 중 하나만 소녀의 얼굴일 뿐인데도 거대한 물뱀이 소녀처럼 느껴지는 게 참 재밌었습니다. 그 부분을 제외한 많은 부분이 물뱀인 데다가 위대한 티폰과 에키드나의 따님 분답게 상수리열매 하나만 한 거짓을 얘기한 노예장과 그 수하를 무참히 죽였더라도, 평범한 소녀처럼 화관에 내심 기뻐하고 글리우케와 얘기도 해서겠지만요. 사람의 형태나 표정이 없는 기계에게도 이름을 붙여 불렀을 뿐인데 일주일만에 애착이 생겼다는 실험의 결과 같기도 하고요.
또 비유 같은 말이 사실로 이루어지는 건 얼마나 멋진지요! 제우스의 피를 기만한다는 말은 불가능을 뜻하는 숙어로 쓰이지만, 제우스의 자식인 헤라클레스를 속임으로써 히드라는 정말로 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 전에 속아 넘어간 헤라클레스가 깨진 도자기를 보면서 메두사 같다는 말을 하는데 너무 정확해서 웃고 말았어요.
딸이 걱정되었던 아버지의 말, 누이의 죽음을 비통히 여긴 케로베로스와 질문에 답한 두 여신 덕분에 복사뼈가 어여쁜 소녀는 떠나온 고향에 바닥없는 마음을 준 이와 돌아오고, 그가 영영 자유롭길 바라며 자신의 남은 생을 뒷걸음질 친 신께 바칩니다. 찾아오는 신의 한탄대로 엉켜버린 시간 속을 거닐며 과거의 자신을 히드라와 만날 수 있는 길로 이끌고요.
오랜 폭력에 지쳐 까칠해진 강력한 괴물과 도움이 간절한 인간 소녀, 과거의 자신을 도운 미래의 자신 등 장르에 충실한 전개가 그리스 신화의 옷을 입고 글리우케가 거닌 세계로 저를 이끌어 준 듯한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 만난 건 히드라를 나쁜 근돼로부터 구하고 싶었던 작가님의 마음이었고요.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