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말할 수 없는>을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모습을 판타지 세계에 투영한 색다른 판타지이자 혁명에 대한 글로 읽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정확히는 사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는 여러 관계와 인물들이 나온다. 세계의 배경은 현실이 아닌 판타지이며, 드래곤이나 정령이 나오는 세계가 아니라 조금 더 낯선 세계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았으면서 동시에 다른 세상이어서 우리 사회의 문제나 갈등이 그대로 투영된다. 초반부를 읽을 때 이 낯선 세계관이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다 읽고 나야만 완결까지 재미있게 달리게 되는 소설이어서 차분히 읽어보기를 권한다.
낯선 세계관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을 하나만 말하자면, 인간과 샤메네다. 샤메네라는 종족은 자살하지 않는다면 ‘영생’할 수 있는 종족이며 바로 그렇게 영원을 살아가기에 인간보다 필연히 뛰어나다. 소설은 명문대 진학에 몰두하며 은근한 따돌림과 입시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박난아라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크세라페’라는 낯선 나라에서 전학 온 학생이 난아를 거울로 밀어버리기 전까지 그녀에게 일상이란 팍팍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거울 너머의 세상으로 떨어진 난아는 자신이 실은 인간이 아니며, 인간과 샤메네의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처음으로 만난 저 너머 세상의 인물 이사금 역시 인간과 샤메네의 혼혈로, 낙원이라는 혼자만의 나라를 만들어 살아가고 있는 자였다. 수험생에서 낯선 이세계의 방문자가 된 것까지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때 나는 좀 더 극적이고 액티브한 사건사고를 기대했다. 허나 그보다는 조금 더 깊이 있고 차분한 소설이었다.
이 소설이 액티브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사건이 발생하며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간다. 다만,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만큼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 파편화된 장면들이 모여서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사건과 상황은 발생하나, 사건과 상황에 집중할 수는 없고 여러 인간군상을 보게 되는 형태로 이야기가 직조돼서 신기했다. 그런 한편, 캐릭터가 많아서 헷갈리기도 했는데 인물의 이름마다 성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붙이는 방식을 취해서 그 인물이 어느 나라 소속인지 알 수 있는 점은 좋았다. 이를 테면 낙원에 사는 이사금은 이사금 낙원, 우바르사디 출신의 헤이트미는 헤이트미 우바르사디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 소설의 첫번째 사건이라면 평범한 수험생이었던 박난아가 자신의 언니가 실은 이세계의 존재이며, 언니가 난아를 만들어서 어머니의 뱃속에 넣었다는 사실이었다.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왔던 과거가 뒤흔들릴 만큼 놀라운 상황에서 난아는 자기가 몰랐던 자신의 에너지와 기술을 발견하고 그 기술을 발현해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그 기술과 예기치 못한 결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지점을 점하고 있기 때문에 말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허나, 이 소설 안에서 그것이 자극적으로 보여지기 보다는 파편화된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그려내지기 때문에 생각보다 파급력 있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이 소설을 읽기 어렵게 한 건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관과 여러 인물들이었지만, 동시에 그 여러 인물들이 제각각의 시선과 욕망을 갖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각자의 인물들 나름의 욕망과 번민, 갈등과 여러 감정이 잘 표현되었다는 의미다. 여러 인물들으로 시점이 변경되는데도 소제목으로 그 인물의 이름을 밝혀줘서 조금은 덜 헷갈리며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내 집중을 부른 것도 그 인물 나름의 감정선이었는데, 돌려 받지 못할 사랑을 끝없이 누군가에게 주는 자라던가, 사랑을 동경하나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그 인물들이 보여서 꽤 이입하며 읽었다. 특히 나는 스란 우바르사디라는 인물이 좋았는데 그 인물은 ‘입지적’이다.
말하자면 천민 계층, 아주 가난한 빈민층에서 가장 부유한 공장장이 되었다가 한 나라의 권좌에까지 오르게 되는 인물인데 그 인물이 간절히 바랐던 것은 사실 ‘사랑받는 것’이었다. 그 인물이 애정한 자들은 그 인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상대의 탓만은 아니었다. 본인이 스스로 그 입지를 자처한 측면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물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 헤매고 고뇌하며 서글퍼하고 다시 딛고 일어나며 스스로 자신의 결말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그 인물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이념대로, 욕망대로, 선택하는 대로 나아가는 인물들이 하는 자그마한 행동 혹은 큰 액션이 모여 대단원의 결말을 맺었다. 아쉬운 점은 이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 박난아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난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파편화된 여러 인물의 이야기에서 순간순간 몰입할 수는 있었지만, 이 소설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은 부족했다고 본다.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조금 집중력을 잃었는데 그것은 내가 따라갈 만한 이입 대상이 부족해져서다. 스란에게 몰두할 만하면 다른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그 여러 인물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소비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감정적으로 느끼기엔 다소 어려웠다.
여러 인물의 시각에서 보여주는 것은 좋으나, 그래도 조금 더 메인에 가까운 인물 서사가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읽다 보면 이 인물들이 좀 더 메인에 가까울까 싶었던 캐릭터도 분명 있으나, 그렇게까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또한, 이것은 극히 개인적인 취향인데 나는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반드시 필요한 영역의 것이지만 직설적으로 표현될 때는 경계한다고 보는 게 맞겠다. 혁명에 대한 것은 그 자체로 ‘강렬’해서 소설을 인물과 이야기가 이뤄낸 하나의 세계로 보고 빠져들게 하는 게 아니라, 자꾸만 현실로 돌아오고 ‘혁명’이라는 것의 주제나 의미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바로 그래서 글을 쓸 때나 읽을 때 ‘중심’을 잘 잡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어느 한 편의 편을 들지 않고 여러 측면을 고려하며 치우쳐지지 않은 시각으로, 또 너무 그 이야기만 쓰지 않는 상태로 가고 있는가 뭐 그런 종류의 말이다. 뭐라 말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는 좋지만 거기에 프로파간다나 이념이 끼어드는 건 선호하지 않는다.
이 소설 <말할 수 없는>에서 아쉬웠던 점은 중후반으로 갈수록 인물들 각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보다 일종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메시지가 다수 쓰여졌다는 부분에서다. 인물이 인물로 보여지는 게 아니라, 어떠한 메시지의 매개체로 기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캐릭터들이 체스 말처럼 이용되는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89화까지 천천히 혹은 빠르게 읽어온 소설의 끝에서 결말의 이미지는 좋았으나, 이사금과 낙원 그리고 난아의 세계와 생각을 읽어내기에는 너무 소란스러운 사건이 다수 전개돼서 그 의미랄까, 이 소설에 담긴 작가의 마음이랄까 하는 것이 온전히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몇몇의 국가가 망하고 또 서로간의 알력다툼을 하고, 여러 시위가 벌어지고, 각자의 이권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나는 무엇을 읽어냈는가 생각해본다. 반복되는 이야기였고, 여러 나라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너무도 인간적인 이야기였다. 욕심을 부리고, 너무 큰 욕심에 눈이 가려져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서로 이용하면서도 ‘영원히 품어주고 품을 사랑’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잡히지 않는 희망을 기대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동시에 인간이란, 인간을 닮은 종류의 것이란, 영원히 살면서 스스로 죽을 수도 있는 종류의 종족이란 헛된 희망을 키우고 그 희망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삶의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는 나름의 감상 아닌 감상을 했다.
허나 나는 조금 더 캐릭터와 그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혁명이나 나라라거나 하는 거창하고 커 보이는 이념적인 것 말고,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 말이다. 나는 이 소설을 보면서 그러한 내밀한 이야기에 반응했다. 하지만 그들이 행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그저 반복된다고 느꼈다. 어쩌면 하나의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각자 다른 이야기라던가 혹은 그 끝이 정해진 하나의 파국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 뒤에 파국 뒤의 후일담을 각자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조금 더 ‘집중된 게’ 있었으면 어땠을까 한다.
사람마다 감상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 소설을 참 복잡하게 읽었다. 좋아서 밑줄 긋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이를 테면 실패한 통치자에 대한 이야기다. 카람은 스스로를 희생했으나 모두를 배불리지는 못했고, 마호마가니는 성공한 상류층을 만들었으나 나라를 영원히 부흥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들의 국가인 쿠르츠는 자신들이 부리던 일꾼으로 가득했던 우바르사디 아래로 통합되는 서글픔을 겪는다. 이 나라는 다시 부흥의 길로는 돌아가지 못했고 끝없이 시위하고 싸우며 노동쟁의를 했을 따름이다.
아무튼 그러한 배경에서 마호마가니가 통치할 땐 카람을, 카람이 통치할 땐 마호마가니를 그리워하는 국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게 재밌었다. 정확히는 카람의 입장에서 말한 대사였다. “내가 왜 당신을 추방하지 않는지 알아? 국민들은 내게 실망하면 당신을 그리워할 거야, 당신이 실패하면 나를 다시 찾을 거고.” 그 말이 끝나고 난 뒤에 카람이 혼자 독백하듯 서술된 내용에선 이런 말이 있다. <국민들은 나를 원하고 원하지 않았다> 라는 말이 기묘하게도 좋았다. 현재의 세계 안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일은 많이 나타난다. 비단 통치자에 대한 것만은 아니라, 여러 형태로. 인간이란 그런 종족이니까. 원하고 원하지 않는 종류의 종족이며, 자기 멋대로 자기 입맛대로 사고하고 감각하며 상상하는 존재여서 피곤하고 또 재밌다.
그 다음으로 흥미롭게 본 인물은 세레스키카야 크루야라는 인물이다. 자세한 설명은 소설을 통해 볼 것을 권하며 내가 흥미롭게 본 대목은 이 사람이 자신의 연인을 제가 가진 능력을 활용해 ‘꽁꽁 얼려버렸다는 것’이다. 연인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지도 않은 상태로 그자 옆에 영원히 머물렀다. 그는 ‘온전히 나만 사랑하라고 자신의 아기들을 아기로만 머물게 하고, 자신과 다른의견을 가진 연인과 헤어질 수 없어 얼음으로 만들어 소유해버린 자’다. 동시에 결핍된 애정을 늘 갈구하며 얼음이 된 연인을 핥고, 누구에게도 미움 받고 싶어하지 않는 기묘한 자다. 복잡한 내면을 가진 자의 사유나 사상. 생각이 연인을 얼려 소유하고 아기를 아기로 머물게 한다는 서사에서 잘 드러나서 좋았다. 세살 이전까지 아기들은 소유되기 쉬우며 그 시기 동안에 자신만의 사유를 만들어내서 그 뒤로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간다. 세 살 이전의 아기들은 그저 낳은 엄마를 따르며,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아마 그런 사랑을 영원히 맛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기나긴 소설이다 보니 리뷰도 참 길어지고 있다.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리뷰를 쓰기 시작했고 여러모로 감상을 바탕으로 쓰고 있다. 인물에 대한 빛나는 묘사들이 꽤 많았다. 감정선에서도 예리한 구석이 있어서 흥미롭게 봤고, 그 많은 인물들이 각자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꽤 가치롭다 생각한다. 다만, 그 재치 있는 인물과 세계관이 명확하게 잘 보여질 만한 판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아쉽다. 혁명은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혁명, 프로파간다, 전쟁으로 모든 이야기를 보여줄 순 없다. 너무도 내밀한 사유들이 서술되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인물은 내밀하되, 중심 서사는 분명하게 하나 정도는 잡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이를 테면 누군가의 죽음을 하나의 큰 사건으로 잡았다면, 그 이 외의 죽음에 대해서는 힘을 좀 빼야 한다. 강약 조절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결론적으로는 그래, 나는 난아와 이사금의 이야기를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주인공이 난아여서다. 그리고 독자된 입장에서 이입하기 좋은 사람은 역시나 나와 비슷한 세계의 배경을 지닌 난아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들은 다른 세계에 있던 사람이고 물론 이입할 만한 여지가 있으나, 난아만큼 이입되기 쉽지 않다. 난아의 시점으로 조금 더 보여진다면 어떨까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을 남겨본다. 인물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가 구석구석 많으니 이 리뷰를 읽고 궁금해졌다면 한번 차근차근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