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낭만 가득한 곳으로 그리는 해양소설도 물론 있다. 가령 모험소설이라던가, 표류소설과 같은 장르 말이다. 사막이 그렇듯이, 또 우주가 그렇듯이 바다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바다가 긍정적인 공간이냐 묻는다면, 인류 역사상 그랬던 적은 거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바다는 생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싸움터요, 뭇 괴물의 집이요, 땅에서 이루어진 모든 걸 휩쓸어 제 몸속에 가라앉히는 큰 파도요, 마실 수 없는 깊고 넓은 물웅덩이다. 바다는 죽음의 근원이다.
고로 바다는 죽음을 이야기하기 더없이 좋은 무대다. 사람이 죽고 죽이는 이야기, 혹은 사람이 왜 죽고 죽이는지에 대한 두려운 이야기 말이다.
죽음 위를 표류하는 사람의 무리
앤더슨 선장과 선원들은 게잡이 원양어선 ‘스노우 퀸’에 몸을 싣고 베링해 밑바닥에서 왕게를 잡아 올린다. 빠지는 순간 얼어 죽는 바닷물과 강철판 몇 겹만큼만 떨어져서 매일 검고 깊은 바다를 들여다봐야만 하는 그들의 삶은 첨단에 선 것과 같다.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이타심도, 죽음에 슬퍼하는 동정심도, 갑판 위에서는 사치일 뿐이다.
대부분 인물은 투박하고 거친 뱃사람이 되길 선택하며 이 삭막한 환경에 적응한다. 이 ‘게처럼 단단하게 변하는’ 과정은 인간성을 상실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작중 선원들이 꾸준히 보이는 심각한 스트레스와 이를 풀기 위한 말초적인 폭력은 뭍의 법과 자원이 보장되지 않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들의 인두겁 속에 든 것이 더는 껍데기와 맞지 않는 무언가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욕망의 위계와 생존의 먹이사슬
그렇다면 대체 뭐가 이들이 인간성을 포기하게끔 하는가. 인물들은 무엇 때문에 계속 죽을 자리로 나서거나, 혹은 떠밀리나.
앤더슨은 새 배를 얻고자 소득 없는 항해를 이어간다. 갑판장과 선원들은 왕게들이 안겨줄 돈다발만 믿고 미덥잖은 선장의 배를 탄다. 이들이 바다에 나가는 이유는 저마다 품은 욕망이다. 이야기는 배 위에서 얽히는 인물들의 강렬한 욕망을 동력 삼아 시원스럽게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욕망은 두 가지 아이러니한 지점을 가진다. 하나는 앤더슨과 다른 인물들의 욕망이 언뜻 상충하여 보이지만 사실상 기간과 달성 방법만 다른 동일한 성질=자본에 대한 이기적 욕망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극한의 상황에 놓인 등장인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이성을 놓지 않도록 기능한다는 거다. 배가 선원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듯, 욕망은 선원들이 비인간이 되는 것을 막는다.
작중 초프리가 겪는 변태의 과정 역시 이 욕망의 유무에 주목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인간적이었던 인물인 초프리가 배의 첫 번째 낙오자가 되는 건 짐짓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뭍과는 다른 철저한 위계와 약육강식으로 기능하는 배에서 초프리의 자리는 모두의 울분이 가라앉는 밑바닥이다. 죽음과 사람이길 포기한 것들에 깔린 채로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왜 하필 그 많은 비인간적 인간들을 제치고 초프리만이 완전한 게화(Carcinisation)에 성공했을까. 그건 스노우 퀸의 선원 중 그만이 욕망하지 않는(혹은 욕망이 거세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작중 게, 또는 게화한 것들은 자신의 본질을 버리고 오로지 생존의 본능을 처절히 따르는, 그 덕에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다. 초프리 역시 자아와 이성을 유지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기에, 감당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선원들과 달리 자신의 생존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이 그에게 닥쳤을 때, 스스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지 간에 그는 인간으로서 모든 고차원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오로지 생존을 갈망하는 한 마리 게가 되길 선택한다.
게가 됨으로써 초프리와 선원들, 그리고 앤더슨의 위계는 뒤집힌다. 이 역시 작중 배경이 바다이기에 가능한 전복이다. 미시적 시각에서 작품의 스토리는 핍박받던 신입 선원 초프리의 성공적인 복수담이겠으나, 멀리서 조망해보면 사실, 죽음이라는 재앙은 먼바다에서 일어난 파도처럼 이미 스노우 퀸을 향해 일어오고 있었으며 재앙이 들이닥치는 순간까지 생존이 아닌 욕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선원들의 파멸은 자명한 상황이었다. 이는 초프리였던 게가 배 위로 다시 건져지든 말든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자신에게 적응한 초프리의 몸을 빌려 조금 서둘러 갑판에 들어섬으로써, 독자들은 전반부에 동작하던 욕망의 위계가 마비되는 과정과 살아남지 못한 이들이 다른 무언가의 먹이가 되는 그로테스크한 아비규환을 직접 관람하게 된다. 그러다 마침내 죽음이 바다라는 본모습으로 인간을 위한 무대를 모두 쓸어버린 뒤 유일하게 살아남는 비인간의 모습을 조망하는 것을 보며 기이한 공포와 해방감을 동시에 느낀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기이한 괴수 공포물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유려하다. 공포로도, 스릴러로도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다. 글을 마치며 욕망과 생존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먹이사슬, 그리고 결국 그 모든 걸 한 번의 파도로 지워버릴 바다의 두려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