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엔 작업등이 밤새 비추고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 중
사계절 동안 기계를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꽃밭 가득 색색 꽃이 수놓이고 그 위에 나비가 앉아 꿀을 빠는 동안에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다 그치고 무더운 여름이 와도. 낙엽이 지붕 가득 쌓이고 엄동설한에 고드름이 처마에 주렁주렁 달려도 공장에서는 사람이 돌리는 기계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삶이 기계와 같다는 말은 산업화 이후 시대를 막론하고 사용되었다. 공장이 세워진 초기, 조악한 장치들을 번거로이 돌리던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기계와 사람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단조로웠다.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이 그의 영화에서 풍자했듯, 인간은 태엽의 부품 내지는 정교한 연장에 불과했다. 자동화가 아닌, 조금 속도가 빠른 수동 작업을 돕는 것에 불과했던 장치들은 다행인지 급속도로 발전했고, 지금은 생산의 전 과정이 매끄러워 보이는 최신식 공장이 이곳저곳에 앞다투어 지어지고 있다. ‘기계’라는 예스러운 말은 세련된 ‘로봇’으로 바뀌었고, 이제 비로소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지리라는 기대가 생긴다.
지금의 오락거리는 불과 한 세대 전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만큼 다양하다. 그들의 생각을 총동원해도 예측조차 불가능했을 것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즐기고 있다. 생산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이제는 잉여 제품과 폐기물의 심각성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온 세계 사람들이 쓰고도 남음이 있는 기술과 자원, 생산 제품과 식량이 우리의 행성 곳간을 가득 채웠다. 이쯤 되면 인간의 궁극적 유토피아가 도래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세대. 비로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기계’에게 모든 생산을 맡기고 손을 떼는 인류가 탄생해야 마땅한 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반적 세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가는 오히려 사라졌고, 빈과 부의 격차가 하늘과 땅을 넘어 벌어지고 있다. ‘독점’으로 인한 희생은 약자의 몫이고 몰이해와 몰상식이 세상을 잠식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기술의 초고도화가 이루어진 지금, 다양한 놀잇거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생의 단조로움은 해소되지 않았다. 노동자가 쥐고 있는 미싱이 ‘키보드’ 내지는 ‘개개인의 업무 사정’으로 바뀌었을 뿐, 사계절 내내 같은 일상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서두의 인용 가사가 지금도 유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인간은 과거보다 더욱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대체 가능성’과 맞물려 로봇, 기계, 물건, 부품 등으로 치환되는 목숨은 존엄과 배려가 없는 세상에서 쉼 없이 사그라진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단합’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되는 노동 인력에 계급을 매기고 생계에 필요한 최저의 임금을 주는 것이 기본이 된 지금, 노동 인력은 “개인이자 집단”이며 ‘좀비’보다도 운동성 없는 존재다. 그들의 단조로운 삶은 그 직무와 근무 환경에 관계없다.
‘우리’ 인간을 로봇이나 기계, 좀비와 맞바꾸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면 귀여운 ‘인형’은 어떨까. 사람이 있는 한 인형 역시 존재해왔으니 비교적 최근 등장한 기계들보다는 친숙하지 않은가. 장아미 작가의 단편 소설 〈인형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연대하는 공장의 여공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들은 다양한 불평등 앞에 놓여 있다. 여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동시에 지워지고, 남성과 권력 아래에서 무한히 미싱을 돌려야만 했던 그녀들. 아니, 그녀들은 현재에도 있다.
봉제 인형 공장에서 미싱을 열심히 굴려 “보드랍고 말랑말랑하고 폭신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여공들. 그녀들에게 ‘단단한’ 마음도 있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간 작가의 정성 어린 문장은 인형의 피부와 피부를 견고히 직조하는 실밥과도 같다. 다 같은 공산 인형 같지만, 그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것처럼, 공장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도 얼굴이 있고, 이름이 있고, 가족이 있고, 삶이 있다. 〈인형들〉은 모든 것을 잃고 인형이 되고 만 사람들이 아닌, 사람의 성정과 의식을 지키려는 진짜 존재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마음 역시 보드랍고 말랑말랑하고 폭신하니, 기계보다 조금 더 친숙한 ‘인형’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인형을 좋아하세요?
〈인형들〉의 처음은 위와 같이 시작한다. 봉제 인형 공장의 여성 노동자 주인공이 일인칭 고백조로 전달하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독자는 가장 먼저 소재로서의 ‘인형’에 주목한다. 공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미싱과 어딘지 미심쩍은 반장. 이런 소재에는 으레 개성을 빼앗긴 이들의 현실이 사회의 부품처럼 돌아가는, 서두에 언급한 찰리 채플린의 여러 영화를 떠올릴 만한 이야기가 딱이다.
소설의 시작은 독자의 예상과 같이 흘러간다. 관리자를 제외한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인 봉제 인형 공장, 민영이라는 이름의 언니를 사랑하는 것이 주인공의 유일한 낙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익명성을 유지하며 언니 동생으로 호명되는 공장의 노동자 연대를 사실감 있게 그려낸다. 자칫하면 지나치게 일상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소설 속 보통의 하루는 독자에게 말 건네는 어투와 일인칭 시점을 통해 효과적으로 환기된다. 일상을 오히려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가벼운 대화를 삽입하는 한편, 노조, 검정고시 등 현실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작가가 구사하는 고백조는 담담하다. 물 흐르듯 자신의 속마음과 주변의 장면을 묘사하는 주인공의 말투에는 일상성이 묻어난다. 단정하며 정갈하다. ‘공을 들인다’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무엇 하나 삐져나오지 않는다. 만약 이런 어투로 비일상을 이야기했다면, 처음부터 독자의 몰입을 위해 결말부의 전투를 등장시켰다면 오히려 불편했을 것이다. 때문에 작가는 독자의 발걸음이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에서부터 공장의 어두운 비밀로 서서히 옮겨가도록 이야기의 톤을 세밀하게 조절한다.
도입부에서 이 소설은 가벼운 로맨스 같다. 민영 언니를 사랑하는 주인공. 민영 언니를 질투하는 듯하며 대립하는 인물인 숙현. 숙현은 민영 언니에게 대학생 애인이 생겼다는 정보를 흘린다. 언뜻 보면 사랑에 가벼운 방해자가 등장한 느낌이다. 하지만 숙현이 제안한 하룻밤을 보내며 주인공에게는 뜻하지 않은 궁금증이 생긴다. 그것은 평범한 일상을 비일상으로 끌어들이는 작은 사건이다. 숙현은 주인공에게 ‘밤의 공장’에 관해 말한다.
“너 말이야, 밤의 공장에 가본 적 없지?”
현실의 주인공이 판타지 세계로 이행하는 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인형들〉의 주인공 또한 숙현의 이 한 마디에 몽환적 호기심을 갖는다. 공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민영 언니에 대한 분노로 차 있는 듯 보이지만, 발걸음을 움직인 것은 숙현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공포스러운 궁금증이다. 밤의 공장이라니.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숙현의 말은 꽤 힘이 있었다. 주인공은 공장 밖의 현실 세계에서 공장 안의 초현실 세계로 이행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인형이 되어버린 공원들을 만난다.
공원들을 인형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반장이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 장치였다. 솜으로 제작된 인형들은 무쇠 로봇을 이길 수 없다. 작가가 일반적인 스토리텔링을 선택한다면 주인공 역시 다른 공원들처럼 밤새 미싱을 돌리는 인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주인공의 구원자가 나타난다. 그녀의 마음에 항상 있던 민영 언니다.
숙현의 말은 금세 거짓으로 판명 난다. 민영이 정말 대학생을 만나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민영은 주인공의 편이었다. 민영은 주인공을 도와 공원들이 반장과 싸울 수 있도록 한다. 사실, 민영의 위치가 ‘조력자’라는 것은 소설의 초반부터 암시된다. 민영은 항상 노조 사무실에서 공부를 한다. 사측과 조율과 교섭을 하는 입장으로서 노조는 어쨌거나 반장과 대립하는 집단이다. 작가는 민영이 퇴근 후 향하는 곳을 통해 슬쩍 그녀가 반장과 같은 편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주인공과 공원들의 편이었음을 암시한다.
반장과 대립해 싸우는 와중, 작가는 한 번 더 캐릭터의 입체화를 시도한다. 주인공의 적대자, 연적으로 등장했던 숙현을 공원들과 한편으로 만든 것이다. 결국 숙현도 거대 권력의 피해자였다. 가볍게 누군가를 질투했을지는 몰라도, 공장 노동자 또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위치는 주인공과 전혀 다르지 않다. 둘이 전투의 처음부터 같은 편은 아니다. 정신없이 공원들을 수리하던 주인공은 자신의 미싱 아래 놓인 인형에서 숙현의 명패를 발견한다. 우리도 종종 이렇다. 적인 줄 알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같은 편이 될 때가 있지 않은가. 하나의 공통된 적 앞에서 모든 여성. 모든 노동자는 하나가 된다.
반장과 싸우며 주인공이 끊임없이 돌리는 미싱은, 평소의 노동과 전혀 다르다. 반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의지에 불타 동료들을 고친다. 의욕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였을 평소와는 목적도 속도도 전혀 다른 바늘이 쉴 새 없이 작업대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상상된다. 칼과 창을 들고 하는 전쟁에 비하면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쉽게 빠져나가기 힘든 권력에 대항하는 인형 노동자들의 연대까지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권선징악. 노동자들의 솜과 천, 미싱은 무쇠를 이겼다. 반장의 몸은 차례차례 해체되어 다른 인형의 재료가 된다. 그 역시 부서지면 여러 개의 부품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주인공과 민영, 숙현 역시 인형이 되었다. 그들의 노동 역시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은 인형의 존재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인형들은 어린 나이에도 슬픔이란 무엇인지 깨달은 아이들에게 세상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곳은 아니라고 알려줄 거예요. (…) 그러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자랄 것이고 인형들은 그들의 고독을 헤아려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화를 다독여주면서 천천히 낡아갈 거예요.”
인형은 생명력 없는 기계와 같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고 이 소설을 읽어내려가던 독자들은 이야기의 결말에서 그들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서두에서 작가가 내린 인형의 정의를 완전히 잊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서술자의 입을 빌려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인형으로 변함에도 연대할 수 있음’이다. 설령 기계와 같은 나날 속에서 주변을 둘러볼 시간조차 갉아먹으며 산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모두 어린 시절 끌어안고 자던 인형이 있었다. 그 인형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 속에는 단단한 심지 하나 박혀 있지 않았어도, 실밥이 헤어져 기어이 속을 채운 솜이 비져 나와도 스스로 표정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소설 속 ‘인형’으로 변한 여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 그들의 이름과 삶을 궁금해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실밥의 오와 열이 서로 다른 지문처럼 인형을 가로지르듯, 여공들의 손에 박힌 굳은살과 켜켜이 쌓인 삶의 자취는 생김이 모두 다르다. 그녀들이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봉제의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보드라웠던 몸을 뚫고 단단한 부품이 능숙하게 들어간다. 몸과 마음이 다시 터지지 않도록 견고히 꿰메는 기술은 오직 그녀들에게만 있다.
미싱 한번 박아보지 않은 폭력과 권력에 대항해 승리를 거둔 인형들은 “몸속에서 나는 소리”를 그대로 둔다. “솜뭉치”, “공산품”, “값싼 물건”으로서의 정체성을 오히려 소중히 여긴다. 스스로 가진 힘을 과시하지 않고 “무기와도 같은 심장”에 꼭꼭 숨기면서 아이를 단잠으로 인도한다. 그들이 이길 수 있던 이유는 유약한 솜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철은 녹슬면 무뎌지고”,“나사는 돌리면 풀려”나간다. 하지만 솜은 시간이 지나도 조금 눌리거나 뭉칠 뿐이다. 나무 막대기를 양쪽에서 누르면 부러지지만, 고무 막대를 누르면 휘어질 뿐 끊어지지 않는다. 때로 무른 것은 단단한 것을 이긴다. 공장의 ‘인형들’이 무쇠로 된 기계를 무찌른 것처럼.
이 소설은 인형들의 로맨스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권력이 산산이 해체되어 다른 인형의 부품이 된다. 모든 사랑의 형태가 인형이 되어 공장의 미싱을 움직인다. 오늘도 미싱은 잘도 돈다.
인생이 단조로울 수 있지만, 로봇보다는 인형이 되자. 이 소설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만약 여공들이 모두 딱딱히 굳은 기계로 변했다면, 어느 한 곳 성하지 않은 채로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패했을 수 있다. 하지만 따듯하고 부들부들한 솜이, 연대의 마음이 그녀들의 마음에 가득했기에, 공장에서 매일 돌아가던 미싱으로 반장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인형의 삶을 무시하지는 말자.
그리고 단 한 가지를 명심하자.
세상은 천과 천을 잇는 작은 실밥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