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토로하자면 나는 근래 꽤 많이 지쳐 있었다. 이러한 지친 감정은 참으로 오래묵은 것이어서 익숙해질 만한데 그렇지가 않다. 괜찮아졌나 싶으면 다시, 또 괜찮아졌나 싶으면 다시 치밀어 오르는 울분 같은 게 내 안에 있다. 이 감정의 원인이야, 내가 너무도 잘 아는 것이어서 머리로 생각하면 아플 지경이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소설이 내 마음 깊은 곳을 후벼팠던 이유는 주인공 선미 속에 자리한 감정이 꼭 나와 닮아서일 것이다. 나와 같은 이유는 아니다. 허나 참 비슷하다.
오래 묵어버린 감정이라는 것, 어떻게 끊어내기가 힘들다는 것, 벗어나려 해봐도 도돌이표 치는 것 같다는 것…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선미는 이렇게 말한다. “뱃속이 욱신거리지만 괜찮다. 거기에 있던 건 슬픔이 이미 다 끊어먹었다.” 라고. 선미는 제 안에 자리한 슬픔을 제 손으로 떼어버리는 방식으로 오래도록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했던 악몽을 끊어냈다. 너무도 깔끔했고, 그 과정이 담담해서 기이하게도 내 마음은 자꾸만 울었다.
46매로 짧은 분량 안에 이렇게 탄탄하게 이야기를, 인물을 잘 그려낼 수 있다니 다 읽고 나서 새삼 감탄했다.
이 소설 <슬픔이 끊어먹은 창자가 굽이굽이>의 줄거리는 사실 간단하다. 기자를 그만두고 대필작가 일을 하고 있는 주인공 하선미는 아홉시간짜리 자서전용 녹취록을 풀며 쓸쓸하게 서른 네번째 생일을 보낸다. 생일 이틀 뒤에 연락을 준 엄마는 대뜸 오빠를 위해 선미의 신장을 내놓으라며 생떼를 쓴다. <어려선 생 양아치, 좀 커서는 칼 잘 쓰는 조폭, 사람 둘 찌르고 들어간 감옥에서 지역 정치인과 엮인 덕분에 건실한 향토기업의 창업자>가 된 강 회장의 비위를 맞추며 녹취록을 따내는 것도 지치는데 그 와중에 엄마는 제 할 말만 반복한다. 그다지도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건 강 회장과의 에피소드와 엄마와의 에피소드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다는 데 있다. 엄마에겐 인정 받지 못하는, 늘 부족한 딸이지만 ‘양아치’ 강 회장은 스스럼없이 그녀를 인정한다. 저마다의 이유로 그녀를 이용한다는 것에서는 똑같은데 차라리 남인 강 회장이 제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괴롭힐 지언정 돈은 제대로 쳐준다는 데서 가족보다 더 낫다.
가족이 너무도 버겁다는 이야길 들은 적 있다. 가까운 친구에게서도 들었고, 웹상에서도, 소설에서도 참 많이 봤다. 이 소설 <슬픔이 끊어먹은 창자가 굽이굽이>에서는 그 감정을 단 두 번의 ‘독백’으로 표현해낸다. 기깔난다, 라는 말이 참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리 길지 않은데 ‘진심’이 담겨 있다고 해야할까, 단지 읽기만 했는데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주인공이 이 소설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일 테다.
“아아, 엄마를 사랑하는 건 너무 구차하고 비참해.”
선미는 말한다. 보답받지 못할 사랑…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사랑을 돌려 받지 못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엄마, 우리 사이엔 속죄도 참회도 이제 없어.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나는 오도카니 창가에 서서 일평생 나를 허기지게 만들었던 짝사랑의 종말을 애도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할 일도 증오할 일도 없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나 미움이 아닌, ‘철저한 무관심’이니까. 짝사랑이건 그 어떠한 모습의 사랑이건 종결되는 순간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때’이다. 내 인생에서 ‘크나큰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라는 건 얼마나 서글프고도 후련한 일인가. 속죄할 일도, 참회할 일도 없다… 짝사랑의 종말을 다만 애도하는 것이다. 허나 이때도 주인공은 엄마를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했다.
스포가 될 까봐 말을 아끼겠다. 이 소설을 보고 있노라면 주인공 허선미의 마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누구나 가족 관계에서 상처를 받게 마련이니까. 나는 ‘언제나 화목한 가정’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화목하려고 노력하는 가정’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래서, 나는 단 한순간도 ‘화목하고자 노력해본 적 없는’ 가정을 보면 마음이 ‘허’하다. 어쩌면 주인공 선미는 홀로 노력해왔던 게 아닐까. 엄마와 오빠 단 둘 뿐인 가정에서, 자신도 함께할 가정의 화목을 바라면서 끝없이 노력해 왔다면, 보답 받지 못한 ‘노력’의 엔딩은 허무와 서글픔 뿐이다. 그 ‘관계’를 끊어내서야 안온을 되찾을 따름이다.
선미는 ‘그러나’ 자신의 신장을 내어놓기로 한다. 인쇄부터 전국 북콘서트까지 고정된 자서전 출간 일정에 맞추기 위하여 3개월 간 출간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핑계로 ‘그’ 지방에 내려가 있는 동안 엄마와 오빠는 속절 없이 그녀를 기다린다. 아마 그녀 일생 ‘처음으로’ 그들이 그녀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시기일 것이다. 그녀는 그 일정이 모두 다 끝나고 그녀의 신장을 ‘정말로’ 그 오빠에게 넘겨주었을까. 답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길 바란다. 나는 답은 비밀로 감춰두는 대신, 그녀가 강회장에게 했던 부탁의 말로 이 리뷰를 끝내려 한다.
“돈보다 가족의 절망을 원한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강회장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결코 보답받지 못할 사랑을 보냈고, 그 짝사랑을 끝내고 이제는 가족으로부터 떠나온 그녀에게 나는 Easy Life의 Nightmares라는 노래를 선물하고 싶다. 발랄하고 리드미컬한 듯한 멜로디에 어쩐지 가라 앉아 있는 목소리가 인상적인 이 곡은 끝없이 속삭이는 것 같다.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것이 무엇이건. 누구도 나의 악몽에 신경쓰지 않듯, 내가 힘들다고 말해도 관심이 없듯 나도 다른 사람에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고.
이 노래를 한동안 들어보다가 말미에 나만의 가사를 덧붙여 봤다. “그저… 내가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주면 그뿐이야.”라고. 결국에 나를 지탱하고, 나를 사랑하며, 나를 끝까지 책임져 줄 가장 강력한 ‘사랑’은 바로 나에게서 온다. 허니, 이제는 끊어져버린 몸의 일부를 대하듯 가족들을 떠나가기를. 리뷰를 끝내고 난 뒤에도 주절대는 건, 선미의 ‘이후’가 궁금해서다. 소설이 끝나고, 마침표가 찍히고 난 이후의 선미의 삶이 행복하길 바란다. 뭐, 꼭 굳이 행복하지 않아도 좋다. 내일의 태양을 바라보는 게 버겁지만 않길 바랄 따름이다. 오랜만에 참 잘 직조된 캐릭터라 생각했다. 몰입 가능한 서사였고 감정이었다. 혹여나 감상에 방해될까 많은 내용을 아껴두고 ‘드러낼 수 있는 부분’만 리뷰로 써두었으니 이 사담 가득 섞인 글은 참고만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