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기에 앞서 BGM으로 링크 연결해둔 유키 구라모토의 곡 <Appasionato>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들었다. 익숙한 곡인데 제목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열정적으로’, ‘정열적으로’라는 뜻을 지닌 Appasionato. 헌데 이 곡을 듣고 있자면, 내가 아는 열정이나 정열과는 다른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타오르는 불꽃, 휘몰아치는 격동의 감정이 아니라 서늘하고 차가운 가운데 꺼지지 않는 불씨를 바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열정과 정열이 지나간 자리에서 차디차게 타오르는 정념 같다고 해야 할까.
어렸을 때 나는 타오르는 것, 솟구쳐 오르는 것, 피를 토해낼 때까지 미치게 내달리는 것만이 열정이라 생각했다. 허나, 이제는 그렇게 타올랐다 단숨에 꺼져버리는 불꽃놀이 보다 오래도록 뭉근하게 타는 장작불 같은 것이 더 처절하고 멋들어진 정열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음악을 그리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묘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이 곡에서 나는 서늘한 열정을 읽었다. ‘어찌할 수 없어서’, ‘빠져들 수밖에 없어서’, ‘중단할 수가 없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해야만 해서’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끝없이 따라가는 기분이다. 그 무표정 아래 눈물과 환희와 서글픔과 분노와 애욕의 파고가 있었다는 것을, 그 격랑의 감정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평생토록 이어가는 열정이란, 꺼지지 않는 불씨가 남은 숯이란, 여전히 따스한 재라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며 글 속으로 빠져들 준비가 이미 되어서인지, ‘파라소찰은 사선으로 몸을 비틀며 꿀렁거렸다’는 첫 문장을 읽는데 모든 게 잠잠해 보이는 심연의 바다 속에서 저 홀로 깨어난 생명체를 보는 듯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집중했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땅 밑의 광물들을, 수정을 먹으며 삶을 연명하는 이 존재란 무엇일까… 또한 ‘파라소찰’이란 명칭에는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을까 하고. BGM 덕분에 독자인 나는 소설 읽기를 좀 더 흥미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반복재생이었으면 좋았겠단 생각을 했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자꾸 뒤로 돌려서 다시 듣다가 소설 집중에 방해 돼서 뒤엔 노래 없이 들었는데… 조금 아쉬워서다. (딱 도입까지 노래를 듣게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지막으로 들을 때는 인트로에 잠시 멈춰놓고 노래를 들은 뒤에 껐다)
소설의 소개에서 뒤틀린 지반 밑에서 움직이는 것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지하 탐사하러 간 에스터와 인류세로 만들어낸 괴물의 한시적 ‘조우’라고 적혀 있었기에 파라소찰과 에스터가 어떻게 만나게 될까 궁금했는데 둥굴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파라소찰이 ‘먹이’라 생각하고 먹었다 뱉었다는 데서 흥미로웠다. 먹잇감, 즉 피식자와 포식자가 교감하게 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기 때문이다.
더구나 둘의 관계는 단순한 피식자, 포식자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게 이 소설의 특이점이기도 했다. 소설의 배경은 현재로부터 약 50만년 전, 현세의 인류가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다면, 미래의 인류는 절반의 무기물과 절반의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다. 파라소찰은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에서 탄생한 괴물이다. 바다거북의 뼈와 플라스틱 더미들이 뭉쳐졌던 것이 무수한 세월을 거치며 색다른 ‘괴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헌데 이 괴물, 의식 없이 무시무시하기만 한 그런 괴물은 아니다. 따지자면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따스한 온기, 누군가의 마주침을 기대하는 자, 만남과 관계 그리고 상호 소통이라는 교류의 욕망의 가진 자라는 데서 흥미로웠다.
다만, 괴물의 설정에서 아쉬웠던 것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인간과의 접촉을 염원하는 것은 그가 ‘소통할 만한 대상’이 인간밖에 없어서였다. 그는 탄생한 순간부터 ‘외톨이’였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끝없이 탐구했고, 끝없이 실패하다 절망하였다면 파라소찰에겐 크고 작은 파라소찰들이 이미 곁에 있었다. 오롯이 에스터가 만난 파라소찰 단 하나만이 유일한 존재였다면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인간을 만나고 싶어 그랬다’라는 걸 깨달은 순간 좀 더 먹먹하게 다가왔겠지만 지금은 자신과 같은 종족이 있는데 어째서 인간을 만나고 싶어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플라스틱을 만들어 낸 게 인간이고, 파라소찰의 동굴의 근원이 된 게 과거의 인간이어서라는 배경서사보다, 에스터와 파라소찰 사이에 ‘무언가 좀 더 정서적으로 마음을 교류하고 쌓을 만한 에피소드나 지점’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과 괴물, 피식자와 포식자의 ‘조우’라는 데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예기치 못한 만남 그리고 서로가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이어지는 가운데 알게 모르게 쌓여가는 ‘정서’ 였다. 첫 만남은 파라소찰이 에스터를 먹었다 뱉어버렸다는 데서 이미 흥미로웠다. 또한,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풀어낸 것도 좋았다. 에스터에겐 파라소찰이 강아지 같았고, 파라소찰은 돌봐줘야 하는 작은 생명체가 제게 재롱을 부린다 생각해서 잘해줬으니까.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보면서 <모든 관계는 오해로부터 시작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타인을 오해하며 좋아하고, 오해하며 싫어하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모두 한 면으로 존재하는 ‘평면적 존재’가 아니며, 여러 면을 가진 입체적 존재라는 걸 나는 늘 생각한다. 그 측면에서 초반부에 ‘세팅된 캐릭터 설정과 관계성’이 좋다고 생각했고, 바로 그래서 그 다음 전개가 아쉬웠다.
파라소찰이 태어나게 된 과정을 ‘파라소찰의 꿈속’에서, 환상 속에서 바라본 에스터가 느닷없이 깨달음을 얻더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결말이어서다. 피식자와 포식자 관계로 처음 만났다가 서로 감정을 교류하고 서로의 결핍을 알게 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건 좋다. 지금 소설이 나아간 결말 역시 충분히 이해가고 좋은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중간 과정’이 다소 비어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웠다는 이야기다. 환상을 보여주는 그 이상으로, 파라소찰과 에스터가 가까워질 만한 ‘상황’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에스터에게 파라소찰의 ‘과거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도 움직일 만한 ‘아픈 구석’이 있다는 게 보여졌다면 어땠을까. 파라소찰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동력, 이야기가 에스터 안에 ‘이미’ 있다는 게 잘 보여졌다면 조금 더 잘 따라갈 수 있었을 거 같다. 지금으로서는 가정폭력을 겪다가 탈출했고, 동굴탐사를 계속 해 왔다는 정보밖에 없어서다.
또 하나, 50만년 이후의 세계와 동굴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분과 두 캐릭터의 생김이나 특색이 좀 더 구체화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에스터는 동굴 탐험가이고 50만년 이후의 사람이다. 절반은 유기물, 절반은 무기물로 이뤄졌다는 게 어떤 모양인지 조금 더 손에 잡히는 묘사가 없어서 머릿속으로 그려내기 다소 어려웠다. 그렇대도 사람의 형상일 것이라고 어림짐작할 수 있었는데, 10만 년을 넘게 산 동굴의 구렁이로 표현되는 파라소찰의 경우에는 조금 더 아쉬웠다. 뱀이라기엔 용에 가깝고 용이라기엔 이무기에 조금 더 가까워보이는 존재라는 것과 얇고 유연한 형형색색의 비늘을 가졌다는 것, 생물보다는 광물에 더 가까운 형상이라는 설명이 어딘지 더 두루뭉실하게만 느껴져서다. 일부러 헷갈리게, 두루뭉실하게, 어떠한 모양이든 보이게 묘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 유형일 경우가 많고 이것은 완전히 ‘판타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조금 더 분명했다면 파라소찰이라는 캐릭터에 좀 더 마음으로 이입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들었다.
예를 들면,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시체로 만들어낸 존재, 괴물 역시 실존하지 않는 미지의 것이고 두루뭉실하게 묘사되지만 분명한 ‘포인트’가 있어서 상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8피트(약 245cm)의 신장, 긴 흑발, 황안, 혈관이 그대로 비춰보이는 피부,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팔과 다리의 비율 같은 것 말이다. 이 정도로 몇몇 명사,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이 있다면 따라가기 쉬웠을 거 같고 이는 동굴에 대한 묘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차근차근 읽어보았지만,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동굴과는 어쩐지 다른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50만년 뒤 지구의 지하 광산, 더구나 갑작스레 지반이 무너져버린 도시에 존재한 공간이라면 더더욱 멀게 느껴졌다. 그 공간에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독자 역시 느낄 수 있는, 잡고 따라갈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더욱 좋을 거 같다. 독자의 입장에서 리뷰를 쓰고 있는 내 입장에서도 아쉬움을 토로할 뿐, 어떻게 구체화하면 좋을지는 아득하기만 하니… 어쩌면 무책임한 리뷰일 수도 있겠지만 ㅠㅠ 공간, 외양, 캐릭터의 사정이 잘 그려지지 않아서 한번 이야기를 해본다.
흥미로운 설정과 캐릭터, 시의적인 문제의식(폐플라스틱으로 인한 지구 파괴)으로 시작해 ‘앞으로 나아가는 유형’의 결말로 끝을 맺어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다. 아쉬운 점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말 그대로 독자의 입장에서 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캐릭터의 관계성, 구체적인 외면과 내면에 대한 묘사, 장소와 시공간에 대한 묘사 그리고 분명한 사건,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 소설은 더욱 재밌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노래로 시작하여 파라소찰에 대해 한번 생각하고 들어갈 수 있게 한 시도가 좋았고, 소설 중반부에 이 소설의 배경이 사실은 50만년 이후의 세계라는 걸 설명하는 대신 ‘고대문헌 중 일부 해독문’을 통해 짐작하게 한 뒤에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나이스했다. 아쉬움이 남는다는 건 잘 썼다는,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허니 이 리뷰를 보고 궁금해졌다면 소설 <파라소찰>을 스윽 읽어보도록. 흥미롭게 다 읽고 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또 한번 생각해보게 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