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의 철학적 분석과 장르적 비평 비평

대상작품: 용사와 두부김치 그리고 마왕 (작가: 게도영,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2시간 전, 조회 17

소설보다 긴 리뷰 쓰기

내가 미쳤지 미쳤어

 

사실 이 소설은 꽤 초창기에 발견해서 너무나 재밌게 읽고 읽기목록에 넣어둔 소설이었다.

 

 

1) 두부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로 건배하는 쇼펜하우어와 카뮈

[밥은 먹고 다니냐?]

우리말에서 밥이 차지하는 자리는 유별나다. “밥 먹었니?”는 안부이고, “언제 밥이나 같이 먹자”는 우정이며, “밥맛 떨어진다”는 혐오의 표현이고, “밥맛이다”는 권태의 선언이다. 이렇듯 밥은 단지 식사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이자 감정의 척도다. 생존의 가장 기초적인 행위가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소통의 형식이 되는 문화. 그 문화를 용사와 마왕으로 은유되는 두 철학자에게 들이밀어보는 것이 이 소설이다.

 

[마왕—영원히 고통받는 쇼펜하우어]

· 세상이란 실은 지옥이다. 인간은 한편으론 들볶이는 영혼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영혼 속의 악마이기도 하다.

· 개개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곤궁이나 무료함과의 투쟁일 뿐 아니라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는 곳마다 자신의 적대자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싸우면서 살다가 손에 무기를 든 채 죽음을 맞이한다.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존재는 고통이며, 의지는 맹목적이고, 세계는 소멸되어야 마땅하다. 뭐 그렇다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일반적인 대화 선에서 말해지는 비관주의나 염세주의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철학과 출신이 아니다. 걍 인터넷에서 주워담은 것들로 쓰는 중이다.

마왕의 서사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염세주의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서사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읽힌다. 스승이자 주인이었던 마법사 치케스에게 노예로 착취당하고, 살가죽 위에 마법 문자가 새겨지는 고통을 겪으며, 사랑했던 이를 인간의 손에 잃은 마왕의 이력은 쇼펜하우어적 세계 인식의 전형적인 경로다. 세계는 맹목적인 의지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의지는 고통만을 생산한다. 마왕이 선택한 답은 “세계 포위 멸망 마법”이다. 마왕에게 이것은 단순히 악당으로서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철학에서 비롯된 논리적 귀결이다.

“예를 들면, 세계 포위 멸망 마법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내 끊임없는 고통을 끝내기 위함이고, 태어남으로써 고통받는 생명을 해방하기 위함이고, 지상 위에 모든 사악한 것들을 정화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악당의 세계정복 선언이 아니라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도달한 결론, 즉 의지의 부정과 세계로부터의 해탈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밀어붙인 말이다.

가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마법 문자들은 그가 결코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새긴 낙인이며, 옥좌라는 절대 권력조차 그 고통을 지우지 못했다. 마왕의 파괴 충동은 그러므로 단순한 잔인함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받는 고통의 근원을 세계 자체로 진단한 자가 내린 극단적 처방이다. 그냥 다 같이 멸망하자는.

쇼펜하우어가 금욕과 예술 속에서 의지를 일시적으로 부정하려 했듯, 마왕은 세계 자체를 소거함으로써 고통의 뿌리를 끊으려 한다.

 

[용사—요리사가 된 카뮈]

· 삶에 대한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알베르 카뮈

카뮈라면 마왕에게 이렇게 받아쳤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그 부조리 속에서 반항해야 한다고. 용사의 처지는 카뮈의 부조리 철학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다. 그는 삶을 반복하는 저주에 갇힌 시간 속의 방랑자다. 영웅으로 살다 죽고, 농부로 살다 죽고, 나뭇꾼으로 살다 죽고, 도적의 노예로 살다 죽고, 이중간첩으로 살다 고문당해 죽는다. 심지어 마왕을 암살해 보기도 하고, 마왕군에 가담해 왕국을 무너뜨려 보기도 한다. 모든 수단을 시도해 본 자, 모든 방향에서 실패해 본 자, 그것이 용사다. 이 반복은 시지프스가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행위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무의미가 반복되고, 출구는 없으며, 그 사실을 오직 자신만이 완전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카뮈가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썼듯, 용사는 무너지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생을 거치며 그가 도달한 결론은 거창하지 않다. 타인을 억지로 설득하기보다는 그저 지금 이 순간에 따뜻한 음식을 나누는 것, 그냥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시도하는 것이 이 지옥 같은 반복을 견디는 가장 유효하고, 동시에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 그것이 용사가 수만 번의 죽음 끝에 배낭 속에 챙겨 넣은 결론이다. 그래서 그는 마왕의 마력탄이 바닥을 박살 내는 순간에도 꿈쩍하지 않고 재료를 꺼내 요리를 시작한다.

이 행위는 카뮈가 말한 부조리에 굴복하지도, 부조리를 외면하지도 않는, ‘반항’이다. 다만 용사의 반항은 무기를 들거나 주먹을 쥐는 대신 보온병 뚜껑을 여는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고 소박하고 평화적이다.

주목할 것은 용사가 목적론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롭다는 점이다.

“저는 그냥 제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입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든 다시 삶이 반복되든 상관없습니다.”

그는 내세도, 구원도, 의미의 완성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나눠먹고자 하는 게 전부다.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 대신 현재에 대한 열정을 권했다. 용사는 그 권고를 두부김치 한 접시로 구현해낸다.

 

[두부김치와 막걸리—철학적 충돌을 해소하는 음식]

그런데 만약 이 두 철학자가 실제로 한자리에 앉아 두부김치를 집어 들고 막걸리 한 사발을 기울인다면?

이 소설이 선택한 가장 ‘위대한’ 일은 화해의 매개물을 거창하거나 귀족적이거나 고급스러운 것이 아닌, 소위 ‘소박하고 서민적인’ 두부김치와 막걸리로 설정했다는 점이라 본다. 두부김치는 우리에게는 고급스럽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음식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세계에서는 생소하고 호기심을 유발한다. 동시에 따뜻하고, 속을 채우며, 무엇보다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막걸리도 마찬가지다. 목을 축이는 동시에 경계를 낮춘다.

“캬~! 진짜 맛이 좋네요”라는 용사의 감탄사 한 마디는 어쩌면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철학적인 문장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감탄은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긍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소설이 한국적 감수성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의미를 갖는다. “언제 밥이나 같이 먹자”는 말이 단순한 식사 약속이 아니라 관계의 시작과 유지를 뜻하는 문화, “밥은 먹었니?”가 사랑과 관심의 다른 표현인 문화에서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곧 타인을 받아들이는 행위와 동의어다. 용사가 수없이 많은 환생으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말로 설득은 어렵지만 함께 뭔가 먹는 것은 쉽다. 논리가 닿지 못하는 곳에 밥 한 그릇은 닿는다.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오래된 평화의 제안이다(뭐, 매번 잘 되는 건 아니지만서도). 마법 한 번이면 세계를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에게 그냥 밥을 같이 먹자는 제안. 이보다 더 인간적이고 용사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현재의 긍정—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조용하면서 감동적이다.

어디선가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

이 문장은 두 철학적 극단이 서로를 완전히 논파했거나 어느 한쪽이 굴복했기 때문에 쓰인 것이 아니다. 마왕이 염세주의를 포기했다는 증거도 없고, 용사가 부조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다만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대화를 부드럽게 쌓으며 함께 웃고 있다.

카뮈가 말했듯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 고통은 존재의 본질에 가깝다. 마왕의 가면 아래 마법 문자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용사의 삶은 내일 또 처음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막걸리 한 사발과 두부김치 한 접시는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재가 살 만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이 ‘카르페 디엠’의 진정한 의미다. 내일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이 온기가 진짜이기 때문에 지금을 긍정하는 것.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마법도 예언도 전설의 검도 아니었다. 함께 나눈 한 끼의 식사였다.

 

[밥이나 먹고 가라]

쇼펜하우어와 카뮈가 만났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처음에는 팽팽하게 맞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두부김치 한 접시를 내밀었다면, 두 사람 모두 결국 젓가락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막걸리 한 사발을 부딪치며 건배사로 ‘카르페 디엠’을 외쳤을지도.

밥 한 그릇 앞에서는 쇼펜하우어도 카뮈도, 마왕도 용사도 그냥 배고픈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배고픈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는 그 순간만큼은, 세계는 멸망하지 않아도 된다.

 

 

2) 마왕의 옥좌 앞에 돗자리를 펴다

[클리셰, 기억하십니까]

판타지 소설에는 오래된 약속-클리셰가 있다. 마왕은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 용사는 마왕을 죽이러 간다. 둘은 싸운다. 누군가 죽는다. 둘 다 죽거나. 이 구조는 장르의 문법이자 독자와 작가 사이의 암묵적 계약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척하다가 슬쩍 내용을 바꿔치기한다.

용사는 마왕을 죽이러 가지 않는다. 밥을 먹이러 간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장르를 파괴하거나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왕의 궁전, 옥좌, 지팡이, 전설의 투구, 세계 멸망 마법 같은 장르적 요소들은 충실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현대 웹소설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을 법한 클리셰들을 의도적으로 한 자리에 집결시킨다. 마왕 대 용사의 전통적 대립구도, 삶이 반복되는 회귀물, 전생과 환생을 오가는 빙의 서사, 그리고 ‘이세계인’과의 조우까지. 요즘 웹소설 시장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줄여 부르는 이른바 ‘회빙환’의 요소들이 이 짧은 소설 안에 모두 들어있다. 이 소설은 판타지라는 집을 허물지 않았다. 다만 그 안의 가구들을 몰래 재배치했을 뿐이다. 이 부분이 너무나 내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전부 다 있다. 전부 다 비틀었다. 그런데 웃기려는 의도가 없다.

 

[루프물의 클리셰를 비틀다—각성하지 않는 용사]

회귀, 빙의, 환생. 현대 웹소설 장르에서 이 세 가지는 거의 공기처럼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루프물, 즉 삶이나 시간이 반복되는 회귀 서사는 하나의 확립된 하위 장르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루프물의 문법은 대체로 이렇다. 주인공은 반복을 인식하고, 매 회차마다 성장하며,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무기로 삼아 마침내 반복을 탈출하거나 완벽한 결말을 쟁취한다. 전생의 기억으로 이번 생의 적을 압도하고, 반복된 죽음의 경험으로 누구보다 강한 전사가 된다. 루프는 주인공을 갈고닦는 숫돌이고, 주인공은 그 숫돌 위에서 날카로워지는 칼날이 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용사는 그 공식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는 반복을 통해 강해지지 않는다. 마왕을 더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터득하지도 않는다. 영웅으로 살다 죽고, 농부로 살다 죽고, 도적의 노예로 살다 죽고, 이중간첩으로 살다 고문당해 죽는다. 마왕을 직접 암살해보기도 하고, 반대로 마왕군에 가담해 왕국을 무너뜨려 보기도 한다. 모든 수단을 시도해 본 자, 모든 방향에서 실패해 본 자, 그것이 이 소설의 용사다. 수많은 회차를 거쳐 그가 도달한 결론은 엄청난 전략도 인간을 상회하는 전술도 아닌, “타인을 설득하기는 어렵지만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것은 쉽다”는 것이었다.

회귀물 장르가 반복을 통한 능력치 상승의 서사라면, 이 소설은 반대로 반복을 통한 기대치 하락의 서사다. 그것도 자조적인 의미의 하락이 아니라, 진정으로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내려놓는 방식의 하락이다. 용사는 각성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앞에 놓인 것들, 지나온 것들을 수긍한다. 이 소설에서 루프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최강의 전사가 아니라 요리를 잘하는 중년 남자다.

 

[마왕 서사의 클리셰를 비틀다—이유있는 악당]

판타지 장르에서 마왕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 설명되지 않는 순수한 악이거나, 비극적 과거를 가진 이해 가능한 악이거나. 이 소설의 마왕은 후자의 계보에 속하지만, 그 처리 방식이 다르다. 비극적 과거를 가진 마왕 서사의 전형은 대개 그 과거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용사가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화해나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슬픈 회상 장면이 있고, 눈물이 있고, 용서와 참회가 있다.

이 소설에서 마왕의 과거는 그런 방식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노예 출신이라는 사실, 치케스의 마법 문자가 새긴 고통,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 모든 것들이 용사의 입을 통해 담담하게 나열될 뿐이다. 마왕의 반응도 눈물이나 분노가 아니라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쏘는 것으로 처리된다. 과거는 화해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는다. 용사는 마왕을 이해하거나 설득하려고 그 과거를 꺼낸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을 뿐이다. 비극의 서사화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이 선택이 오히려 마왕의 고통을 더 실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대결 서사의 클리셰를 비틀다—싸우지 않는 최종 결전]

용사와 마왕의 만남이라는 설정은 장르적으로 당연스럽게 최종 결전을 예비한다. 독자는 무의식적으로 전투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기대를 교묘하게 활용한다. 마왕은 실제로 마력탄을 발사하고, 용사를 가루로 만들 마법을 준비하며, 지팡이를 겨눈다. 긴장은 충실히 작동한다. 그러나 그 긴장이 해소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마법이 완성되는 순간 용사는 배낭을 열고, 마왕은 음식 냄새를 맡는다. 결전의 서사를 식사의 서사로 미끄러뜨린다.

여기서 소설은 독자의 장르적 기대를 배반하되 실망시키지 않는 묘기를 부린다. 기대가 배반당했을 때 독자가 느끼는 것이 배신감이 아니라 쾌감이 되려면, 배반이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해야 한다. 이 소설은 전투 대신 식사를 놓아둠으로써 그 조건을 충족한다. 이 장면에서 독자는 전투보다 식사가 덜 극적이지만 훨씬 더 진실하다는 메시지를 발견한다.

 

[이세카이물의 클리셰를 비틀다—강등된 이세계인]

현대 판타지, 특히 라이트노벨과 웹소설에서 이세계 소환은 거의 불가침의 특권이다. 이세계에서 왔다는 사실 자체가 주인공을 일반인과 구별하는 근거가 되고, 현대인의 지식과 감각은 이세계에서 무적의 치트키로 작동한다. 그로인해 이세계인은 선택받은 자이거나 적어도 특별한 존재다.

이 소설에서 이세계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처리된다. 보온병, 두부김치 레시피, 막걸리 제조법을 용사에게 전달한 사람. 그뿐이다. 이세계인은 주인공이 아니라 요리의 재료와 레시피 공급처로 격하된다. 그리고 마왕의 입을 통해 이세계인들의 운명이 건조하게 고지된다.

“수학을 할 줄 아는 놈들이 있어 두어 명을 신하로 삼은 일이 기억나는군. 나머지는 말도 잘 안통하고 쓸모도 없어서 노예로 삼았거나 사형시켰거나 했을 것이다.”

이세계 소환이라는 장르적 특권이 이 소설에서는 생존조차 보장하지 못했다는 냉소와 비틀림이 담긴 대사다. 회빙환 시대 웹소설의 단골 설정인 ‘이세계 소환’을 짧은 대화 몇 줄로 조용히 비틀어버리면서, 동시에 그 이세계인 덕분에 탄생한 두부김치와 막걸리가 결국 마왕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아이러니를, 소설은 풍자적이면서도 진지하게 처리한다. 이세계인은 등장하지도 않지만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용사의 증표 장면—클리셰를 뒤집는 방식의 유머]

용사임을 증명하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웃긴, 웃기려는 의도가 명확한 클리셰 전복이다. 장르의 문법대로라면 용사의 증표는 신성한 검이거나, 빛나는 문장이거나, 운명적인 예언의 성취다.

그러나 이 소설의 용사는 바지를 내려 엉덩이를 보여준다. 볼기의 반점이 용사의 증표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장르의 신성함을 해체하는 개그지만, 소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마왕은 그것을 보고 진지하게 검토한다. 황당함을 황당하다고 반응하지 않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정보로만 처리하는 마왕의 태도가 오히려 이 장면을 더 웃기게 만든다. 이런 진지한 개그조차도 너무나 내 취향이었다.

 

[이 소설이 놓인 자리]

이 소설은 마왕과 용사의 전통적 대립구도 위에 회귀, 빙의, 환생, 이세계 소환이라는 현대 웹소설의 유행 문법을 모두 올려놓고, 그것들을 하나씩 예상 밖의 방향으로 비튼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단순한 장르 패러디에 머물지 않는 것은, 비틀기의 방향이 언제나 더 인간적인 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리셰를 비트는 소설은 많다. 나도 매우 자주 시도한다. 하지만 클리셰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비틀 수 있다는 것은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웃기기 위해 비틀지 않았다. 이 짧은 분량 안에서 모든 클리셰를 비틀고도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고, 심지어 진지하고 웃기고 감동을 전하기까지 한다. 진지하다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두부김치 한 접시와 막걸리로 최종 보스를 상대한다는 발상이 그저 웃기거나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소설이 그 발상을 끝까지 진지하게, 일관된 철학을 가진 채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지함의 끝에서,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ps. 하루종일 리뷰만 쓰고 나니 나도 너무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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