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안녕히, 그리고 새우깡은 고마웠어요.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쥐는 누가 책임지는데 (작가: 서재이, 작품정보)
리뷰어: 일월명, 23년 7월, 조회 60

※스포일러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이니, 작품을 읽고 난 후 이 글을 읽어주세요. :)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42이고 지구는 그 해답의 질문을 찾기 위해 쥐가 만들었으며, 그들이 만든 지적 생명체는 돌고래고 인간은 그냥 어쩌다 무식하게 큰 컴퓨터에 불시착한 외계 생명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무수한 농담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다. 종말을 경고하는 돌고래들의 필사적인 몸짓언어를 보며 공중제비 잘 돈다고 박수나 치다가 멸종당하는 인간의 모습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주적 스케일의 불통을 단편적으로 드러낸다.

그놈의 불통. 우리가 관계에 좌절케 하고, 포기하게 하고, 결국 서로를 먹이나 도구 내지 있어선 안 되는 불순물로 치부하게끔 하는 끔찍한 우주적 불통. 과장을 조금 보태어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막막할 만치 두꺼운 단절감을 무너뜨리려는 망치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불통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인류세에 불시착한 히치하이커들

‘지구에 조난된 외계인과 조우한 주인공이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이야기’는 디아스포라, 그중에서도 이방인 소수자와 정주민 다수자 간의 갈등이라는 큰 주제 의식을 함유한다. 주로 다수자―인간은 일반적으로 외계인을 적대시‧물화‧무시하고 핍박과 차별에 시달리는 소수자―외계인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무언가 결핍된 탓에 제지당한다.

이때 가장 먼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작품이 무엇을 외계인으로 지목하는지다. 「쥐는 누가 책임지는데」의 외계인은 ‘몸짓언어로 인간과 소통 가능한 지성체 실험 쥐’다.

주인공 ‘나’가 머뭇거린 덕에 산채로 소각되는 걸 피한 후 하수구로 숨어버리거나 다른 소설의 친척들처럼 사람 뇌를 다지려 드는 대신, ‘나’의 집 거실 한복판에 침입해 자신들을 도와달라 요청하는 그들은 똑똑하고 우호적인 생명체다. 허나 그들이 지성체라는 사실은 외형적 특징이라는 벽에 막혀 인간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인간은 반려의 지위를 얻지 못한 여느 동물들처럼 그들을 대한다. 새와 비슷한 크기의 우주선에 탄 탓에 유리창에 충돌해 조난되고, 종합 비타민제 안전성을 검증하는 데 이용되는 동물과 닮았다는 이유로 제약회사 실험실 우리에 갇히는 그들의 처지는 하필 인류세에 태어나버린 여러 동물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연상한다.

외계 비인간 지성체 쥐 히치하이커들에게 어쩌다 바짓가랑이가 붙잡힌 ‘나’가 “내가 이때까지 외계생명체의 사체를 소각한 거”냐, “다른 쥐들은 외계생명체가 아니라는 거야”며 묻는 질문에는 ‘내가 이때까지 대화할 수 있었던 생명체를 불태운 거냐’는 불안감이 담겨 있다. 거기에다 쥐들이 그린 물음표는 주인공이 받아들였듯 ‘모르겠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그럴지도?’라는 도발적인 답변으로도 읽힌다. 이 중의적이고 서늘한 의문의 화살은 독자를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석적이고 냉정한 엔딩에 대해

쥐들을 둘러싼 상황이 변하기는 요원하다. 주인공의 집안과 소매 속에서 그들은 이야기하고 기뻐하고 애도하는 생물로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바깥선 여전히 동족의 사체가 소각로에 던져지고, 연구자들은 자기가 외계인을 죽였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작품 속 인간은 스스로 권력 구도의 어디에 위치하는지, 눈앞에 어떤 완강한 벽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다행히 그들이 찾은 단 한 명의 경계인인 ‘나’는 비록 수동적이고 소심하고 짜증 많은 소시민이기는 하나 그들의 결핍을 파악하고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쥐들은 새우깡도 잘 얻어먹고 차도 빌려 타며 집으로 가는 로켓에 아마도 잘 도착한다. 우연과 다행과 호의가 그럭저럭 맞물려서 다 잘 풀린 듯 보인다. 그치만, 그러면 다인가.

주인공이 외계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이러한 서사의 여러 변형 중 가장 정석적이고도 문제적인 결말이다. 겉으론 주인공과 외계인의 우정과 아련한 결별이라는 낭만적인 형태를 취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는 결국 인간과 외계인이 화합에 실패하고 좌절한 외계인이 인간을 떠나는 것이다. 경계인이 다수자를 설득하길 포기하고 소수자를 보호하고자 유대를 끊어 내면서까지 그들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피시키는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잘 풀린 것일지는 몰라도 잘 된 것일 수는 없다.

그들이 이곳에 남으려면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 간 폭력적 위계의 해체가 필요한데, 당장으로선 그 방도가 없다. 작품은 쥐들이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관계에 대한 낭만적인 몽상으로 장르의 한계를 감추는 대신 현실을 조명하길 선택하는 작품의 태도는 퍽 정직하면서도 냉정하다.

 

소각과 화장. 지극히 개인적인 수준의 변화

그렇기에 푸른 별을 떠나는 쥐들만큼이나, 그들을 떠나보내는 ‘나’ 역시 주목받아야 한다. ‘나’는 조력자인 동시에 쥐들이 이곳에 남긴 유일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직선형 플롯과 철저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통해 ‘나’가 쥐들과 만난 순간부터 그들을 떠나보내기까지 겪는 사건과 심경 변화에 오롯이 집중한다. 앞서 짚었듯이 ‘나’는 소시민적인 캐릭터다. 그는 일상의 영역이 침범당하고 많은 다수자 중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억울해한다. 하지만 동시에 동물실험 시스템 컨베이어벨트의 끝자락 부품으로 자리한 자신의 직무에 막연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던 이방인이기도 하다. ‘나’ 자신은 비록 자각하지 못하지만, 고민 끝에 산 쥐를 죽이지 않길 결정한 순간 그는 시스템에 잠깐이나마 균열을 내며 경계인이 된다.

균열 사이로 탈출한 쥐들과의 소통은 ‘나’의 이방인적 특성을 점점 강화한다. ‘나’는 자신이 속한 시스템이 무엇을 착취하고 있었는지 질문하고, 착취에 가담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 그것을 선택하고, 피착취자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고자 노력한다. 이 일련의 행보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은 사체 소각이라는 시스템 속 과정이 ‘나’가 주도해 치르는 화장식으로 바뀌는 대목이다. 사체가 든 상자를 무심히 불 속에 던지는 대신 고인의 입속에 쌀을 채우듯 새우깡을 얹어 장송하는 행위는 그가 개인 수준서 최대한의 변화를 이루어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쥐들을 로켓에 태워 지독할 만치 무심한 인간들에게서 멀리 떠나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쥐는 인간을 바꾸지 못하고, ‘나’만 겨우 바꾸고는 뭇 생명이 살 수 있어야 하는 푸른 별을 영영 떠난다. 앞으로 모든 죽은 쥐들을 화장하게 될 주인공이, 어떻게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나.

 

우주를 먹고 살지 않기 위한 한 걸음

굉장히 직설적이고 깔끔한 소설이다. 장르의 명확한 한계를 순순히 인정하고 그 속에서 도출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엔딩으로 우직하게 나아가는 스토리와 명료한 메시지가 돋보인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나’는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 스스로는 동물실험을 하지 않은 비타민을 사고 죽은 동물을 애도하는 개인으로 탈바꿈하고, 약국서 만난 다른 개인에게 경계 너머 무언가 있다고 전한다. 과연 그 파장이 끝까지 퍼져 인간을 바꿀 수 있을까? 쥐들이 언젠가 다시 푸른 별로 여행을 와서 새우깡이 아닌 다른 음식을 편하게 먹을 수 있을까?

인간이 식용 캡슐 안에 우주를 담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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