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암투물이 하나의 세공된 공예품으로 표현된다면 의뢰(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하그리아 왕국 (작가: 난네코, 작품정보)
리뷰어: 담장, 23년 7월, 조회 170

이야기의 속도감은 기승전결이 얼마나 명확하게 구분되고 동시에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로 결정된다. 하그리아 왕국의 ‘기’ 부분은 20화에 걸쳐 진행된다. 이 말만 들으면 하그리아 왕국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소설의 전체 분량이 어느 정도일지 알지 못해 ‘기’ 부분이 너무 길다라고 느낄 수도 있다. 초반부는 하그리아 왕국의 역사와 주요 인물들에 대한 설명으로 대부분의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신 연재 부분까지 읽어 본 내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그리아 왕국은 호흡이 긴 장편소설로 촘촘히 짜여진 세계관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다루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질질 끌리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슬슬 사건이 하나 터지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 부분에서 적절하게 이야기의 ‘승’ 단계로 넘어가 순식간에 속도감 빠른 전개가 이루어진다.

작가가 구상한 세밀한 설정들을 독자들에게 전부 보여줄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강한 장점이다. 유려한 문체로 흡인력 있게 독자를 빨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기’에서 ‘승’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매우 시기적절하고 매끄럽다는 점은 평소 군상극에 관심이 없던 독자라도 주르륵 읽어 내릴 수 있도록 만든다. 나 또한 글을 써온 입장에서도 느끼는 거지만, 보여주고 싶은 하나의 장면을 쓰기 위해선 무수히 많은 계단들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와 설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걸 끈기 있게 쌓아올릴 힘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소리다. 그만큼 하그리아 왕국의 작가가 이 긴 롤러코스터 같은 이야기의 첫번째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고 인내심 있게 글을 써왔는지를 생각하면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조금 더 보고 싶었던 장면이 있다면 이사야와 누르자한의 연합, 그리고 파리사티스와 누르자한의 두뇌싸움이 있다. ‘기’에서 ‘승’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누르자한의 독살 사건을 기점으로 한다. 이전까지의 회차들은 설정을 풀어주는 것에 가까웠다. 물론 필력이 좋고 묘사가 정밀해서 예쁘게 세공된 공예품을 훑는 듯한 즐거움이 있지만 그 필력으로 조금 더 스릴 넘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1왕자비인 파리사티스와 2왕자비인 누르자한은 각각 자신의 남편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여느 군상극들과 비슷하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앞다투고 서로를 견제한다. 그러나 이들이 실질적으로 서로를 완전히 해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왕자비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왕자들끼리 사이가 좋다는 점 때문에 이 부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왕자들 몰래 왕자비들끼리 단순히 기싸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을 세워 물밑 싸움하는 모습을 더 보여 주었다면 훨씬 매력적인 작품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장기기사인 파리사티스와 무희 출신인 누르자한의 설정이 매력적인만큼,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전략에 인물들의 성향이 묻어나왔으면 좋겠다. 인물의 설정과 성향은 다르다. 그저 설정에 그치는 것이 아닌, 서사에 영향을 주고 뒤흔들 정도의 임팩트가 있으면 한다.

예를 들어 장기기사인 파리사티스는 고귀한 신분인만큼 사교에 있어 높은 재능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장기기사는 설정에 불과하지만,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그는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보는 재주가 있고 여론을 형성해 자신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라고 하면 그것은 성향이 되는 것이다. 이때 누르자한에 관한 험담 등으로 상대를 몰아세우는 방식이 아닌, 은밀하고 은유적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를 볼 수 있었다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반면 누르자한은 파리사티스 입장에서 천한 무희인만큼 일반 평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현실에 관해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길렀을 것이다. 장기기사인 파리사티스가 숲을 본다면 누르자한은 나무를 본다. 계획적이고 판을 짜는 주체인 파리사티스와 달리 누르자한은 빠릿하고 융통성 있고 재치가 있다는 설정을 끌어낼 수 있다.

‘기’ 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의 설정을 서술함과 동시에 파리사티스가 키워둔 판을 통찰력으로 간파하고 이리저리 회피하며 반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동시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사야를 끌어들여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들에게 대항하는 등의 장면들을 보여주었다면 더 흥미진진한 전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누르자한의 죽음에는 반전이 있긴 했지만 누르자한은 일회성으로 나오고 말 캐릭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개인적으로 파리사티스와 누르자한 두 사람이 최애였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진 듯 하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들 또한 무척이나 많았다. 그중에서도 왕자들과 아버지들의 관계, 그들의 성향과 가치관에 대해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몇 보였다. 1왕자 아르샨은 특출난 재능은 없는, 독자가 보기에 가장 평범한 존재다. 그러나 정통성이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1왕자가 정통성만 믿고 열등감에 똘똘 사로잡힌 존재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는 성실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1왕자의 창술 스승인 아토사 장군은 1왕자의 꾸준함을 믿고 자랑스러워 한다. 그러나 노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은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2왕자 이스카는 결투에서 불새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1왕자가 보는 와중에 어머니인 사흐라자드는 자신이 2왕자를 가장 사랑한다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이 티를 낸다. 그 부분에서 아르샨은 질투와 속상함을 느끼지만 이는 상황에 의한 지극히 당연한 마음이었다. 아르샨은 이스카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아꼈으며 이스카가 땀을 뻘뻘 흘리며 검을 들고 자신과 대치하는 순간까지도 그를 연민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2왕자를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1왕자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들 중 ‘평범함’에 속한 자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일념 하에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단련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비범한 자의 재능에 가로막혀 좌절하는 모습은 측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1왕자 또한 해피엔딩을 맞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그리아 왕국의 캐릭터들은 누구 하나 미워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각각의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이루어진 세계관과 달리 다채로운 인간상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이 소설을 보는 묘미 중의 하나이다.

 

2왕자는 1왕자와 달리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에도 왕좌에 오르고 싶지 않아 한다. 사흐라자드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자 후계자로 지목하고 싶어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2왕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것들에 대해 만족하며 살고 싶어 한다. 자신의 아내 누르자한과 함께 안온한 삶을 누리고 싶어한다. 만약 그가 왕이 된다면 분명 성군이 될 것이다. 그가 작성한 책에서는 외부 민족들을 포용하자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으니 덕이 있는 자가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르자한의 죽음은 어찌보면 필수불가결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스카는 총명하고 건실한 청년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무엇보다 지키고 싶은 범위가 나라 전체가 아닌 자신의 가족에 그쳐 있기 때문이다.

이스카의 아버지 타흐마탄 또한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는 어른으로서 조금 더 자신의 아들이 자기자신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테다. 위대한 타인의 분신이 아니라 이스카 본인으로서 살기를 바라는 건 어찌보면 아버지가 가지는 가장 보편적인 마음이 아닐까. 작중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하고, 2왕자 이스카가 받는 사랑은 독자가 보기에 가장 일반적인 사랑이므로 더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모함과 살의가 가득한 궁중이라면 더욱이.

이스카에게 닥친 일은 그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시련일까, 아니면 1왕자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일까. 그들의 상황을 숨죽이고 지켜보게 된다.

 

3왕자는 1왕자와 2왕자와는 달리 성에서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3왕자를 가장 위험인물로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왕자와 2왕자는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연민을 느끼고 우애를 느낀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 앞서 함께 알고 지냈던 시간들이 바닥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싸움은 더 비극적이고 서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3왕자는 다르다. 그는 권력욕도 많고 다른 왕자들에게 그리 큰 우애를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오래 떨어져 살면서 오로지 왕이 되고 싶다는 일념 하에 버티고 버텨왔기 때문이다. 1왕자와 2왕자가 마지못해 서로를 겨누고 비틀거리는 순간 3왕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제 3왕자가 반격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독자들은 긴장하며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하그리아 왕국의 강점은 단연 튼튼한 설정일 것이다. 포도주는 니스산에서 나온 것이 최고급이라는 등의 세심한 설정들과 역대 왕들의 이야기, 연표들을 통해 독자는 하그리아의 왕국이 일종의 진실된 세계라고 여길 수 있다. 그 설정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몰입하게 된다. 동시에 궁중 암투물인만큼 더 소름끼치는 큰 그림과 복선들 또한 기대하게 된다. 하그리아 왕국이 결말에 도달하면 우리는 어떤 장면을 볼 수 있을까. 누가 왕이 되고, 왕이 되지 않은 자들은 어떻게 될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뒤집어 줄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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