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마녀라는 소재를 참 좋아합니다. 판타지에서 등장하는 마녀 뿐만이 아니라, 중세 시대 화형으로 사라진 여자들을 가리키는 마녀도 좋아합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학살은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와 다른, 받아들일 수 없는, 낯선 ‘너’를 ‘우리’에게서 배제합니다. 중세의 마녀는 갖가지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누명을 쓰고 고문 받다가 죽었고, 거기에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사악한 마귀와 악마 대신 차가운 이해득실과 계산이 있었습니다. 마녀 사냥은 꽤 돈벌이가 되었다고 하죠.
하지만 그렇게 죽은 여자들 가운데에서 진짜 마녀였을지도 모르는 여자들이 간혹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화형시켜도 다시 살아나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온갖 고문을 가하려 해도 조금도 먹히지 않았던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마녀에 대한 공포를 조성하기 위한 사람들의 음모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모르는, 알 수 없는 마법적이고 환상적인 어느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이비는 철저하게 ‘우리’를 낯선 ‘저들’에게서 분리합니다. 모 종교가 길가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말을 걸면서 포교하려고 하는 건 사실 포교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하고 거절당함으로서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자기들끼리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또 사이비는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며 제한적인 인원의 숫자를 정해 놓습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숫자는 정해져 있고, 특별히 선택 받은 ‘우리’가 거기에 들어갔다는 식의 논리는 사이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논리입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이비들의 공통점을 보면 외부와의 단절, 세뇌, 한 명의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립하여 살아갈 수 없게끔 그들 무리에 의존하고 의지하게 만드는 점 등이 있습니다. 최근 사이비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에서도 해당 내용이 잘 나오지요.
그들만의 결속을 다지는 행위, 의식, 예배는 그들 사이의 유대감을 강화합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밖에 없고, 바깥의 사람들을 우리를 알아 주지도,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는 비극적인 현실에서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자신, 을 연기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연기하던 과거의 자신이 지금 자신의 등을 떠밀어, 사이비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아도 벗어날 수 없게 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이제 와서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것을 부정하기 힘들어서. 여기서 나가봤자 밖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잘못된 믿음은 그렇게 자기 세뇌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이비와 마녀의 벤다이어그램을 그려 보면,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타자화. 사이비는 그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세계를 타자로 만들고 마녀들은 교회와 성직자들에 의해 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호기심을 가지거나, 혹은 그것이 아주 멋진 것, 새롭고 신선한 것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지금까지 나의 세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은 익숙해질 때까지 ‘타자’로 남습니다. ‘우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 그것은 시간이 지나 점점 익숙해지면서 나의 세계로 스며들어 결국 다 같은 ‘우리’가 되기도 하지만, 영영 우리의 이해 바깥에서 타자로 머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를 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해도 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연쇄 살인마의 과거 행적과 발언, 그가 남긴 기록이나 흔적을 되짚어보며 그의 세계를 해체합니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사고하여 사람을 죽이고 해치게 되었는지를 알아냅니다. 물론 그것이 절대적으로 진리는 아니겠지만, 다양한 해석과 연구를 통해 우리는 비슷한 사례를 찾고 더 나아가 앞으로 벌어질 연쇄 살인을 저지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연쇄 살인마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세계에 들어가 그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고, 그의 행동 양식대로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간혹 이해는 하지만 공감할 수 없고,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연쇄 살인마는 우리에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고, 처벌 받아야 하는 죄인입니다.
물론 교도소에서는 인간의 자기 계발과 변화, 발전을 믿고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반성하여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게 연쇄 살인마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죄를 뉘우치고, 사회에 나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생활할 때, 그의 범죄 이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분명한 사실이고, 없었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흔히 낙인 효과라고 합니다. 범죄를 저질렀으니, 다음에 또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며 멀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의 깨달음과 뼈를 깎는 노력과 의지로 사람은 힘겹게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바뀐 그 사람을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겠으나, 우리는 언제나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인은 평생 죄인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피해자가 원하는 한 그는 계속 죄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어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고, 엎어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으며, 뱉은 말은 취소할 수 없으니까요. 그가 숭고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을지라도 그의 잘못, 범죄, 그가 남긴 상처는 계속 다시 되새겨지고 주목되어야 합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훌륭한 사람이 되면 덮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가지면 곤란하겠죠.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을 영원한 타자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될 수 없는 것을 애써 받아들이려 하면 할수록 서로가 더욱 괴로워지고, 어쩌면 나의 세계에 분열이나 파괴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나친 이해는 때로 자신을 갉아먹기도 합니다.
‘달길’에 등장하는 사이비는 어린 아이들을 유괴하고 세뇌시켜 학대하고 착취합니다. 그곳에는 많은 아이들이 납치되어 갇혀 있었고, 세뇌를 통해 그들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세계는 곧 사이비의 어른들이 가르쳐 준 세계였고, 바깥은 무서운 곳, 더러운 곳, 불경한 곳으로 여깁니다. ‘혜진’은 그곳에 있던 아이들 중 가장 세뇌가 잘 되었던, 흡수력과 이해력이 지나치게 좋아 사이비의 세계를 금방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인 아이입니다. 사이비의 어른들은 그런 ‘혜진’을 기특하게 여기고, 모범적이라고 여깁니다. 아마 사이비가 와해되지 않고 계속해서 세를 불려 나갔다면 ‘혜진’은 그곳의 가장 으뜸 가는 신도로서 더 많은 아이들을 납치하거나 사람들을 끌어 모았을지도 모릅니다. 저 바깥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끔찍한 범죄로 여겨지지만, 이곳 사이비의 세계에서는 반대로 오히려 매우 권장되는 바람직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혜진’을 비롯한 다른 많은 아이들이 갇혀 있던 사이비는 외부 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녀’, 즉 ‘마녀’입니다. 그녀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밀실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사이비 종교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고발하여 아이들을 구출하고 사이비를 체포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그녀는 혜진에게 달길을 통해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혜진이 달길을 통해 빠져나오기 전에 이미 사이비 종교에 너무 세뇌되거나 하여 벗어나고 싶다, 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걱정한 것 같습니다. 혹은, 아주 먼 미래 고등학생이 된 혜진의 상황을 예견했거나. 어느 쪽이든 그녀는 마녀였고, 혜진은 그 마녀의 세계 역시 빠르게 흡수하고 이해합니다. 그녀가 마녀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혜진은 사실대로 모든 것을 말했음에도 사이비에게, 이후 사이비를 체포한 경찰에게 이해 받지 못합니다. 마녀라는 개념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비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사이비의 세계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천천히 자신들이 살아 온 세계가 잘못되었음을 배우고 조금씩 사회에 적응해 나갑니다. 그 과정은 아이들 자신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사회는 그들에게 찍은 낙인을 벗겨 주지 않습니다. 몇 년에 한 번은 꼭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이비 관련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은 고스란히 노출되고 그것은 지금의 아이들에게 낙인이 됩니다. 낙인을 찍어야 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임에도, 세상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들에게 더 집중하고 관심을 갖습니다.
그저 말하는 것을 따르기만 해도 되었던 세계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마주한 것은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혜진을 비롯한 수혜와 시우는 학교에도 다니고, 수업도 받고, 친구들과 곧잘 어울리지만 사이비가 방송에 한 번 나오면 전학을 가게 되고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들은 사이비에게서 벗어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사이비에게 세뇌당한 아이들로 보았고, 그들이 편안하게 여긴 세계는 잘못되었던 것이기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모르는 척, 없었던 척 할 수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배제당하고, 소속감과 무게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사이비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사회에 녹아들 수도 없는 아이들은 고통 받습니다.
사이비라는 범죄를 우리가 이해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낙인을 찍어야 할 것은 그 피해자들이 아닌 가해자 범죄자입니다. 흔히 사기를 당한 피해자에게 ‘왜 진작 알지 못했냐’ 라든가 ‘왜 그런 수법에 당한 거냐’라고 추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한심해하는 반응이 나오곤 합니다. 그럴수록 피해자들은 더욱 위축되고, 자신을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며, 사기 당했다는 사실을 쉽게 밝히지 못하게 됩니다. 그 자신이 비난 받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잘못 찍은 낙인 때문에 아이들은 고통 받지만, 누구도 그것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아이들의 부모님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자퇴를 할지, 계속 학교에 다닐지, 전학을 갈지 고민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리고 결국 수혜가 세상을 떠납니다. 누구보다 믿음직하고, 의지할 수 있고, 다정하고 착하던 수혜는 그만큼 자신의 불안과 걱정,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 공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큰언니, 맏이가 되어 줘야 하기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수혜가 가장 먼저 떠나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혜는 사회에도 이해 받지 못하고 사이비로도 돌아갈 수 없는데, 같은 처지의 아이들에게도 온전히 이해 받을 수 없었습니다. 어디로도 갈 곳이 없어진 수혜는 그 어디도 아닌 곳으로 떠납니다.
남겨진 아이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시우는 수혜를 죽인 것이 세상의 잘못된 관심과 그저 오락으로 피해자를 소비하는 사회 탓이라고 외치지만, 그래서 그런 내용으로 인터뷰까지 하지만 세상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수혜는 시우의 말대로 끝나지 않는 비뚤어진 관심, 계속되는 집요한 연락과 취재 요청, 몇 번이나 사회에게 거부당하는 경험으로 세상을 떠날 결심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수혜는 그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해 죽음을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이비 종교의 주교가 외친 이름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는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수혜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불안이 파문처럼 번집니다.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가장 든든하고 따스했던 수혜의 죽음은 아이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서로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어쩌면 그들은 가장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경험한 것이 같다고 하여 꼭 같은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시우가 혜진에게 ‘사라지지 마’라고 말한 것이 무색하게도 혜진은 서랍 깊은 곳에서 그녀의 거울을 꺼냅니다. 이 세계가 장혜진이라는 한 사람을 받아 주지 않았기에. 세상 사람들과 장혜진은 철저한 타자였기에. 장혜진 뿐만이 아니라 그 사이비 종교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모두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타인이기에 혜진은 달아납니다.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이해해 주고, 포용해 주며 타인이 아닌 우리로 여겨 줄 세계로. 거울을 꺼내 손에 쥐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입이 주문을 외우고 몸이 움직입니다. 혜진은 달길을 걷기 위한 모든 절차를 훌륭히 해내고 눈을 감고 눕습니다.
거울 안에 있던 흰 가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마녀들만 알고 있는 비밀의 마법 가루일까요. 팅커벨의 날개에서 떨어진 가루처럼 혜진을 멀리 네버랜드로 날아가게 해 줄까요. 치명적인 극약일 수도, 환상만 보여 주는 마약일 수도, 그냥 아무 맛도 안 나는 가루였을지도 모릅니다. 혜진은 눈을 뜰 수 있을까요. 눈을 뜨면 그 세계는 혜진이 속할 수 있는 세계일까요. 저는 그러길 바랍니다.
마녀와 사이비와 소녀 모두 좋아하는 소재이기 때문에, 즐겁게 읽었습니다. 마녀의 세상으로 훌쩍 떠나 버린 줄 알았던 그녀가 의외로 현실적인 측면에서 혜진을 구해 주는 부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더 좋았습니다. 그녀가 혜진을 계속 생각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다정함과 섬세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비록 현실 세계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낙인을 찍고 평생 사이비 종교의 희생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지만, 그녀는 어쩌면 그것까지도 내다 보고 혜진이 마녀의 세상으로 건너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혜진이 다른 아이들도 모두 데려갈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혜진이 진심을 걸고 고백한 진실을 믿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 시우나 수혜가 혜진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다면 함께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근 사이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겪고 피해자로 낙인 찍혀 고통 받을 것을 알면서도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진실을 밝히고자 용감하게 나온 증인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가시밭길을 걷길 자처한 그들에게 피해자의 낙인을 찍고 잘못된 시선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간혹 범죄 피해자들이 평생을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고통 속에서 ‘피해자 답게’ 살아야만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피해자 답게’가 아닌 ‘사람 답게’, ‘나 자신 답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겠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피해를 예방하고, 이미 고통 받은 이들을 고통에서 끌어 올리고, 우리가 우리의 치부를 받아들여 반성하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타인은 나와 다른 사람이기에 더 많은 이해를 줄 수 있고 더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좋은 글에 대한 부족한 감상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