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진기행 비평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작가: 점선면, 작품정보)
리뷰어: 해리쓴, 23년 6월, 조회 35

1.

개인적으로(라고 썼지만 많은 분이 동의해주시리라 믿는데), 추리/스릴러 소설은 두꺼워야 합니다. 적당한 분량으로도 빼어난 완성도와 재미를 주는 작품들이 있지만, 그런 작품을 읽을 때면 컵밥 용기에 담긴 국밥을 보는 것처럼 섭섭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국밥은 역시 커다란 뚝배기에 넉넉하게 담겨 있어야 제맛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600페이지가 넘는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은 책을 쥐는 순간부터 만족감을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껍고 재미있는 소설과 침대, 한가한 오후. 좀처럼 포기가 안 되는 조합입니다.

 

2.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의 배경은 묵진이라는 도시입니다. 위치는 경상도 해안가 어디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입니다. 자연스레 「무진기행」의 무진이 떠오르네요.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 같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지명을 사용하는 방식은 여러 효과를 얻기 좋습니다. 우선 친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주고, 해당 작품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실제 지명이 주는 고정관념이나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죠. 더 나아가면 배경 자체가 작품의 테마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뿌연 안개로 전후 세대의 가치관 혼란을 표현했던 「무진기행」처럼요.

묵진은 어떤 도시일까요. 그곳은 항구 도시이고,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합니다. 선원으로 일하러 온 외지인들이 드나들고, 그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집창촌 육사골목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발전했으나 지금에는 다른 항구들에 밀린 상태이고, 성인오락실과 유흥업소로 그득합니다. 쇠락한 듯하면서도 묘한 활기가 감도는 곳입니다. 묵진의 성격은 묵진에 관한 우스갯소리에서 드러납니다.

 

“일단 들어봐. 묵진에 소산포라는 곳이 있는데, 거긴 배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노래를 틀어줘. 곳곳에 스피커를 틀어두고 말이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알지? (중략) 그래서 묵진 사람들은 십 년인 넘는 동안 그 노래만 들으면서 아침을 맞는 거야.

(중략)

날은 덥고 연설은 지루하고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서 지쳐 졸기 시작했어. 무려 한 시간이나. 이제 공연을 시작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지쳐있으니 힘을 좀 내야겠다. 분위기를 띄워야겠다 싶어서 행사 관계자가 노래를 틀었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행사 시작을 알리기에 제격이겠다 싶었던 거지. 노래를 틀자마자 사람들이 깨. 그런데 그냥 깨는 게 아니야. 누구든 옷을 갈아입는 시늉도 하고 밧줄 당기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도 있고. 일하러 나갈 준비를 하더라는 거지. 정말로 일하러 가는 사람도 있고. 그제야 뭔 행사가 이 모양이냐고 화내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어둠과 욕망이 뒤섞인 항구 도시답지 않은, 기묘한 근면성이 인상적입니다. 묵진이란 공간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런 배경과 어울리게, 소설의 문장도 차갑고 단단합니다. 힘찬 직유를 활용하고, 생의 더럽고 비루한 부분을 거침없이 클로즈업합니다. 문장은 공간과 어우러져 하드보일드, 또는 느와르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입니다.

 

땀으로 범벅이 되고 통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지아를 마주했다. 그 너머에서 뭔가 끓어넘치고 있었다.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곪은 여드름처럼 터져 나오는 존재가 있었다. 목을 가르고 두개골을 열어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려는 중이었다. 지아는 점점 통제권을 잃는 걸 느꼈다. 선처럼 얇은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3.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의 주인공은 염지아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5.18 민주화 운동으로 암시되는 사건을 통해 어머니를 잃고, 그 트라우마로 혜수라는 또 다른 인격이 생겨납니다. 이 소설의 주요 서사는 혜수가 19년 동안 몸을 지배한 상태에서 벌인 일들을 지아가 추적해가는 과정입니다.

지아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19년의 세월이 통째로 사라졌고, 눈앞에는 시체가 놓여 있으니까요. 거기에 웬 미친 여자가 찾아와 ‘빨간 수염’이 기다린다고 소리치며 습격하는 사건까지 벌어집니다. 지아는 혜수가 벌인 일들을 알아내야만 합니다. 그래서 혜수가 19년 동안 머문 묵진을 찾아갑니다.

이 소설의 재미는 주인공이 또 다른 인격의 행적을 추적해가는 데 있지만, 서브 주인공들이 뒤얽힌 서사 구조 또한 흥미진진합니다. 전직 형사이자 프리랜서 기자인 강규식은 19년 전 폭행 사건을 벌이고 홀연히 사라졌던 지아가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을 품습니다. 그는 은밀히 지아의 뒤를 캐고, 그녀가 묵진에서 벌이는 일들을 감시합니다. 지아를 찾아왔던 미친 여자(진희)의 아버지인 관훈은 젊을 적 군대에서 당한 사고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그 자국에서는 빨간 수염이 돋습니다. 그는 혜수가 19년간 묵진에서 벌인 일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아는 혜수를 추적하고, 그런 지아를 규식이 추적합니다. 혜수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관훈은 가만히 기다리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모종의 이유로 지아의 추적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혜수에 대한 강렬한 증오로 가득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정교하게 설계된 인물 관계와 구성 덕분에 추리는 숨 가쁘게 이어집니다. 지아가 마주한 시체는 무엇인가? 혜수는 묵진에서 19년간 무슨 일을 했으며, 어째서 그런 일들을 벌였을까? 묵직한 이 두 줄기의 미스터리는, 6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의 뼈대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