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전성기라 불리던 21세기 초엽이 지나고 머지 않은 미래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자 사람들은 좀비를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각 가정에는 좀비 발전기가 설치되고 집에 있는 좀비의 수가 곧 부의 척도가 되는 세상에서 주인공 ‘여정’은 자신의 부사수 ‘보라’가 회사에 몸을 기증하고 통 속의 뇌가 되어버린 회원들을 멋대로 풀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아주 약간의 피만 섞인 사람들의 시체마저 꾸역꾸역 모았고 무연고자의 비율은 줄어만 간다. 노인들은 조금이라도 정정할 때 보건소로 가서 자발적으로 좀비 바이러스를 주입받고 가족을 위해 좀비 발전소 챗바퀴에서 하염없이 뛴다. 좀비 인력거, 좀비 전력, 좀비 음식물 처리반… 좀비가 됨으로써 스스로 삶의 질이 올라갔다고 여기는 자들. 뛰는 것이 곧 덕목이 되어버린, 쓸모를 증명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먼저 죽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자신의 집에 좀비가 더 많아져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테니까.
대기근 때 좁은 방구석에 번데기처럼 몸을 옹송그려 앉은 채 서로가 먼저 죽기만을 빨리 바라던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떠올랐다. 음식이 없으니 움직임에 드는 에너지는 최소화시켜야겠고, 눈앞의 가족은 나보다 일찍 죽어서 부디 내가 그 살점을 뜯어먹을 수 있길,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서로를 잡아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좀비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이곳은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대안이 분명 존재함에도 좀비를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여기서 이상함을 느꼈다.
좀비를 동력으로 한 발전은 효율이 그렇게 좋지 않다. 물론 화력 발전이나 핵융합 발전보다 환경 문제가 덜 하겠지만(혹은 아예 없겠지만) 그게 건물의 설계 및 구조와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을 뜯어고칠 정도로 경제성이 있는가? 철저한 자본주의 세계관에서 기계보다 값싼 좀비를 사용한다지만 발생하는 전력량이 너무 적으며 이동할 때 전력이 손실되므로 각 가정마다 동력 장치를 따로 설치해야 하지 않은가. 좀비 바이러스 창궐로 인한 시스템 마비와 위험도 높은 핵발전소의 가동 중지 때문에 새롭게 떠오른 에너지가 좀비라 쳐도 단순히 효율과 경제성으로 돌아가는 공장 시스템 같은 말로는 전부 표현할 수가 없다. 물론 좀비라는 것이 노동자, 인간이라는 부속품의 의미를 가지고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비효율적인 상황을 연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좀비 동력 시스템은 에너지로서 사용할 때 한계점이 너무나 눈에 띄고, 작중에서도 언급이 된 바가 있다.
그래서 놓치지 않아야 할 점이 있다. 여기서 핵심은 혐오다.
그 온갖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좀비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유는 인간이 좀비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좀비가 죽여도 되는 인간이어서 그렇다곤 한다. 죽어도 되는 사람들, 죽어서 우리에게 봉사해야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 믿어지는 자들.
좀비 동력 발전 장치의 시초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브라질에서 있었던 좀비 챗바퀴? 조금 더 이른 시기로 가보자. 좀비가 끄는 인력거 영상이 유행했을 때로. 영상을 찍은 자는 좀비를 희화화하고 비웃기 위해 그를 묶고 살코기를 매단 낚시대로 이리저리 인력거를 끌게 만든다. 단순히 ‘재밌어서’라는 이유 밑에 깔린 정서는 ‘그래도 되니까.’이고 가장 아래에 자리한 것은 바로 좀비에 관한 혐오일 것이다.
그 혐오야말로 최고의 동력이다. 그건 자본주의 시스템보다 선행되었고 사람들에게 노동자라는 좀비를 기꺼이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강인한 비위를 만들어주었다. 교과목 중 근지구력 과목이 너무나 명백한 의도로 중요시 되었음에도 말이다. 좀비가 부족해지면 대신 챗바퀴에 들어가 좀비처럼 발로 뛰어야 하는 자는 본인인데 정작 좀비를 그저 도구로 생각하고 부품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현대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혐오라는 건 때론 착취의 명목이자 정당화로 작용하기도 한다. 혐오로 인해 견고해지는 피라미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챗바퀴 안의 챗바퀴 안의 챗바퀴. 사회 전반이 커다란 마트료시카처럼 겹겹이 쌓인 껍질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몇 번째 껍질에 자리잡고 있을까?
자신의 죽은 몸과 살아있는 뇌를 이원화하여 몸은 좀비로서 전력을 생산하게 하고 뇌는 가상현실 속에서 안락한 환각을 맞이할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호러가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조금 읽어보았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 여러 갈래로 의견이 나뉘는 것 같았다. 몸을 포기하고 뇌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선택권’을 얻었으므로 우리 사회가 닮지 않았다는 말도 있고 그럼에도 어딘가 불편함이 느껴지는 기분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 있었다.
나는 그 불쾌함의 기원을 알 것만 같다. 그 선택이 과연 온전히 자발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오히려 선택의 폭이 너무나 좁기에 좀비가 된다는 것이 불가피한 ‘기회비용’처럼 여겨지는 게 더 정확한 듯 싶다. 비슷한 결로 안락사를 들고 싶은데, 스위스나 핀란드 같은 경우에는 안락사가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안락사를 실제로 선택하는 이들은 드물다. 왜냐면 안락사를 하지 않고도 존엄한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다가 죽을 수 있다는 선택지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곳에서 나오는 좀비 동력을 이용한 사회의 모습은 그런 선택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좀비가 되지 않고도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굳이 통 속의 뇌가 되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뇌와 몸을 이원화하여 둘 중 하나를 포기해버리는 자칭 선택지가 있는 사회에 관해서 되려 현재 우리의 사회와 소름끼치게 유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단지 몸을 기회비용으로 생각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통 속의 뇌가 되는 것에 그치는 사람들이 모습이 두렵기까지 하다. 좀비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움직임과 시위, 그중에서도 좀비를 죽이기까지 하는 급진적인 자들의 모임으로 파벌이 나뉘기까지 하는 광경, 자신이 일하던 상조 회사에서 회원들의 몸을 풀어버린 보라까지 결국엔 잡혀가 통 속의 뇌가 되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보라의 경우에는 본보기와 처벌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작용한 듯 하다.
단순히 전체적인 사회 시스템의 자본주의적인 측면만 반영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내재된 혐오라는 본질에 관해 드러내고 이러한 세상이 지속될 때 순응하는 자와 순응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 그리고 순응하지 않는 자들의 시위가 어떻게 변모하거나 여러 의견으로 또다시 나뉘는지에 관해 말해준다는 부분에서 이 소설은 오한이 들 정도로 고증이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