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미열에 한 번쯤 앓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당장 고열로 치솟아 쓰러질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힘들게 어른거리는 몽롱함. 그건 몸살을 떨쳐낼 때까지 은은하게 일렁이다가 자취를 감추곤 하지만 때로는 미약한 발열감에 사로잡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작품은 은연중 우리의 곁에 도사리던 열기와 광기가 어떻게 불꽃처럼 터져버리는지에 관해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약한 생체를 기계로 대체한 시대, 사이보그보단 안드로이드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도 지구온난화는 지속되었다. 오래 사용한 전자기기에 손을 대면 뜨끈한 감각을 느낄 수 있듯 가뜩이나 컴퓨터나 로봇처럼 메모리칩을 머리에 끼고 몸의 발열 반응으로 인해 올라가는 체온을 낮추기 위한 냉각수 탱크를 목뒷덜미에 삽입한 사람들은 공랭식과 수랭식의 방식으로 제각기 여름을 버티고 있다.
오랜 시간 과열된 기기는 결국엔 회로가 타버리거나 고장나는 것처럼 지구의 인간들도 그랬다. 무더운 여름에, 그것도 지구온난화로 찌는 듯한 더위 아래에서 ‘나’, 그러니까 ‘하디’는 수랭식 바디를 가진 바람에 늘 냉각수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냉각수 대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열을 식히지 못한 하디는 미열에 사로잡혀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겪는다.
함께 살던 세이는 하디가 안쓰러워 그를 위해 다른 사람의 냉각수, 그러니까 체액을 주사기로 뽑아오겠다는 끔찍한 말을 하게된다. 그러나 그런 비인륜적인 일을 어떻게 입밖으로 꺼내냐는 하디의 말에 둘은 크게 다투게 되고 세이는 집 밖으로 뛰어나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하디는 화가 나서 나가버린 세이가 신경쓰이긴 했지만 자신이 일하는 공장으로 가 평소처럼 작업을 시작했다. 수랭식을 채택한 사람들과 공랭식을 채택한 사람들 모두 더위에 허덕이는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하디는 여름에 이 정도 미열이 나는 건 평범한 일이라고 여기고 안전모를 쓴 채 일을 한다. 그러나 그를 계속 어지럽게 만드는 미열 때문에 평소에 하지도 않던 실수를 하게 되고 하디는 결국 천장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물체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 거의 전신이 금속으로 교체되었고 그가 안전모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 덕에 하디는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기절한 시간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자신의 집 소파에서 눈을 뜬 하디는 자신의 뒷덜미가 축축한 것을 깨닫는다. 냉각수 탱크가 깨져 그의 체액 같은 냉각수가 질질 흐르고 있던 것이다. 냉각수의 잔량은 계속 줄어들고 그때마다 경고 배너가 나타났다.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에 필요한 냉각수는 95퍼센트 이상이나 하디에게는 76퍼센트의 냉각수만이 남았고 그마저 깨진 틈으로 액체가 질질 새고 있었다.
하지만 잔량만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다. 가뜩이나 미열이 있던 그는 냉각수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세이가 자신에게 스쳐지나가듯 말했던, 결국 그와의 다툼을 초래했던 아이디어를 실행할 충동에 휩쓸리게 된다.
미열, 그건 앞으로의 열병을 일으킬 전조에 불과했다. 하디는 더플백과 주사기를 챙기고 녹등가로 간다. 빈자들이 모여 있는 소굴이자 한 명쯤 사라져도 사회에 아무런 해악도 없을 존재들이 살아가는 곳. 그는 어떤 미약한 광기에 휩싸인 채 녹등가로 제 발로 기어들어가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오래된 신체 이곳저곳이 뜯겨 방치되어 있는 노인은 자신을 데리고 녹등가를 벗어난다면 냉각수를 주겠다고 말한다. 하디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홀로 걸을 수 없는 노인을 등에 엎고 길을 향한다. 하지만 서서히 올라가는 냉각수 온도에 그는 점점 마음을 달리 먹게 된다. 저딴 노인 하나 두고 냉각수만 챙겨 도망쳐도 괜찮지 않을까.
그는 노인을 두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더플백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곳까지 오는 내내 고맙다고 말하던 노인은 태도가 돌변하여 그에게 악마라고 소리친다. 자신을 놓고 갈 거라는 사실을 직감한 노인에게 하디는 발뺌하지만 자신의 마음 속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노인에게 달려들어 세이가 말했던 대로 주사기를 그의 냉각수 탱크에 꽂아 넣는다. 붉은 피 같은 냉각수를 충분히 손에 넣은 하디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녹등가를 빠져나온다.
광기에 휩쓸린 충동적인 행동에 그는 헐떡이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냉각수를 갈아끼운다. 지친 몸을 이끌고 거실에서 잠이 든 하디는 어느새 세이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고열이 가라앉고 또 다시 미열만 은은하고 몽롱하게 자리잡은 꿈결 같은 순간에 그는 세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까 고민한다. 너를 탓해놓고 되려 내가 그런 비인륜적인 행위를 했다고. 하지만 그 고해는 결코 입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세이가 정당한 방식으로 냉각수를 구해왔기 때문이다.
하디는 부정한다. 이 모든 순간을, 자신이 한 짓을, 세이가 올바른 방식으로 냉각수를 얻어왔다는 사실을. 왜 그랬어. 그럴 필요도 없었잖아. 그는 아마도 자신의 모든 부정한 짓을 살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생각하며 정당화했을 것이다. 그래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냉각수를 얻었다는 결말로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에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이가 평범하게 임금으로 냉각수를 구해왔을 때 하디는 노인이 개죽음을 맞았고 자신은 더 이상 정당화할 여지도 없는 악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곳에서 미열은 뭘까. 단순한 광기? 그렇다면 그 광기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나는 이 작품이 현재의 사회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연한 혐오의 정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휩쓸리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탓하게 된다면 의심없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다. 그래서 그 미열 같았던 편견과 혐오가 순식간에 퍼져나가 사방이 불바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혐오와 광기는 전염성이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던 모든 것들이 힘을 얻어 실체화되는 이유로는 정당화가 자리잡고 있다.
예시로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들고 싶다. 용어가 처음 사용되는 시기에는 참교육이라는 게 일종의 자경단의 활동처럼 보여지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참교육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든 명분을 붙여서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로 자리잡아 버렸다. 어쩌면 그건 단어가 사용되던 순간 처음부터 그랬을 수도 있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심판할 권리가 있을까. 정당화의 문제점은 반성이나 수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그 독단적 판단이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과열시켜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하디는 노인의 목에 주사기를 꽂아 넣을 때 말한다. 나는 처음부터 악마였던 게 아니야. 당신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어. 당신이 나를 악마라고 불러서 내가 그렇게 된 거야.
혐오의 정서는 중력과도 같다. 그건 끊임없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서 낮은 자들부터 천천히 익사하게 한다. 가난한 자부터, 약한 자부터, 아픈 자부터 계속해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위로 외칠 자신은 없고 만만한 아래에는 화풀이 할 수 있어서.
광기가 잠시 누그러진 순간 그는 세이의 말로 자신을 단단히 감싸고 있던 정당화와 자기방어기제가 무너지고 진실을 맞이하게 된다. 미열 같던 광기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한다. 부디 혐오의 세계에서 정신줄을 똑바로 부여잡고 휩쓸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