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식구(食口) :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
이 뜻에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가족들과 함께 한 집에서 거주함으로써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일상생활을 공유한다. 한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그렇게 쌓이는 시간은 식구들 간의 사이를 보다 더 끈끈하게 만들어준다. 사람은 같은 것을 공유하면서 상대방을 보다 친근하게 느끼는 법이니까.
그러나 <평행의 집>에 등장하는 식구들은 좀 다르다. 분명 같은 집에 같은 시간대에 있는데도 서로를 만날 수 없다. 왜 제목이 평행의 집인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모두들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서로를 만날 수 없다? 한 식구들에게 이것만큼 당황스러운 일은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나의 발상은 색다르다. 굳이 상황을 해결할 이유가 있는지. 연락은 핸드폰으로 하면 되고 얼굴 보고 싶으면 밖에서 보면 되고 프라이버시는 보장되니 이것만큼 좋은게 어디있겠냐는. ‘나’는 마음 한구석에 남은 찜찜함을 애써 외면하고 금방 평행의 공간에 익숙해진다.
같은 집에 살지만 생활은 공유하지 않는다니.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식의 궤변처럼 들리지 않나.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식구가 과연 식구일 수 있을까? 만나고 싶으면 핸드폰으로 연락해서 밖에서 만나면 된다라는 말은 가족보다는 친구나 지인과 같은 타인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식구의 기본 전제는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인데, 밖에서 잠깐 보고 싶을 때만 만난다면 남과 다를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문득, 의아해진다. 이 사람들은 남의 집에서 무얼 하는 걸까?
우리 식구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중략)
모르겠다.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었다. 나는 무거운 것들은 의식 아래로 죄다 밀어버리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은 흑미밥이었다.
결국 ‘나’의 찜찜한 예감이 맞았던 것이라 봐도 되지 않을까. 결말에서 ‘나’의 식구들은 사라져버렸고, ‘나’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가족들의 자리를 파고 들어왔다. 마치 한 식구라도 된 것처럼. 심지어 ‘나’는 가족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생각도 없어보인다. 가족들이 사라진 것은 같이 생활을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식구에서 밀려난 걸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나는 식구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가? 다시금 곱씹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