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과 픽션을 아우르며 오래도록 사랑받아 온 장르가 하나 있습니다. 주인공은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인데, 자발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갑자기 이국적이고 낯선 세계로 여행을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순박한 현지인이거나, 신비로운 현자거나, 종교적 체험이거나, 가끔은 마약성 환각물질이죠. 그 만남은 주인공에게 현대문명 속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정신적인 지혜와 만족감, 높은 차원의 깨달음 따위를 선사합니다. 많은 여행작가를 백만장자로 만들어 준 장르인데 딱 맞아 떨어지는 명칭을 찾을 수가 없네요. 이름이 있긴 있어야 할 테니, 편의상 여기서는 ‘신비여행’ 장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엘센 할림』이 이 ‘신비여행’ 장르에 들어간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현대인 주인공(심지어 과학자입니다), 이국적인 환경, 지혜를 간직한 원주민과의 선문답, 장대한 신비체험과 그로 인한 모종의 깨달음이 전부 나오니까요. 그리고 신비여행 문학이 오래도록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게 주제는 아니니까 키워드 몇 개만 빠르게 말하고 넘어갈게요. 오리엔탈리즘! 현지 문화 왜곡! 가난과 고통의 낭만화! 빠밤! 됐습니다. 많은 신비여행 문학이, 픽션이든 아니면 논픽션(이라고 주장하는 픽션)이든, 이런 비판에서 별로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이쯤에서 한비야 여행기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를 욕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고 작품 얘기로 다시 넘어가죠. 신비여행 문학들이 대체로 오리엔탈리즘과 신비주의에 찌들어 현지인들이 처한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면, 『엘센 할림』은 어떨까요? 적어도 이 작품은 스스로가 어떤 장르에 속해 있는지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지 여행가의 신비체험’이라는 신비여행담의 클리셰 중 클리셰를 서두에서 일부러 언급하는 걸 보면 말이죠. 문제가 다발하는 장르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떨까요? 『엘센 할림』은 자신의 속한 장르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지속적으로 거리를 둡니다. 주인공은 과학자답게 끝까지 조금 시니컬하고, 가난과 원시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현대문명에 일침을 가하는 일장연설도 안 나옵니다. 체트라바흐 일가는 뻔한 현자들이 아니라 매력이 있고 말이 되는 인물들이고, 이국적인 문화를 바라보는 방식도 낭만화는 분명 아니죠. 덕분에 『엘센 할림』에서는 보통 신비여행 문학이 주는 설탕을 과도하게 친 낯간지러움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신비로운 무언가는 나옵니다. 깨달음 비슷한 것도 나오고요. ‘사막 고래’는 해석하기 쉬운 상징이고, 고래에 대한 체트라바흐 노인과의 선문답은 다소 뻔하고 직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장르 자체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네요. 현대인이 오지에 가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라는 게 사실 얼마나 다양하겠습니까? 하지만 적어도 『엘센 할림』은 그 깨달음까지 가는 여정을 되도 않는 낭만주의로 치장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최후의 신비체험이 조금 더 순수한 신비로 다가온다는 느낌도 드네요.
신비여행 장르는 결국 현대인의 필요를 반영해 성장했을 뿐입니다. 다른 곳에서 다른 체험을 하면서 내면의 부족함을 채우고 싶으니까 인도에도 갔다가, 티벳에도 갔다가 하는 거죠. 『엘센 할림』은 이 부분에서 성공적이었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몇몇 유명한 신비여행 문학들보다 더 성공적이기도 하고요. 다른 문화를 장밋빛 창 너머로 바라보지 않고도, 정말로 있을 법한 사람들과 모래구덩이에서 좀 구른 뒤에도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진짜 깨달음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