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의 전투형 로봇인 ‘나’는 제작되자마자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되지만 격전지가 아닌, 변방의 작은 위성 ‘캘리포니아’로 가게 된다. 그곳에는 적군인 연맹군에서 제작한 비전투형 로봇 ‘앤드류’가 먼저 와있었다. 인간이 버린 기지에서 오랜 시간 홀로 지낸 ‘앤드류’는 나를 반갑게 맞으며 친근하게 대하고, 처음엔 그를 경계했던 ‘나’도 점차 그와의 생활이 편안해진다. 그러던 중, 본부로부터 위성을 파괴한다는 연락이 오고, ‘나’와 ‘앤드류’는 마지막으로 둘만의 데이트를 하기로 한다.
이 작품은 적군인 두 로봇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사람처럼 생겼고, 사람처럼 말하며, 사람처럼 생각한다. 보통, 어떤 작품에서 로봇이 사람처럼 그려질 때는 로봇의 대척점에 진짜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로봇이 따라 하는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인 ‘인간’ 캐릭터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인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로봇이 그를 따라 함으로써 오히려 로봇과 인간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로봇이 인간이 되고자 발버둥 칠 때, ‘인간’의 조건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가 닿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좀 다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철저히 로봇인 두 인물만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동떨어진 위성의 버려진 기지에 있는 그들은 인간사회에 편입되려 노력할 필요가 없고, 인간에게 복종하라는 법칙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그들은 이상하리만치 인간처럼 행동하려 한다. 정확하게는, 오랜 시간 홀로 지내는 동안 기지에 저장된 방대한 양의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 ‘앤드류’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나’는 처음에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그와 거리를 두고 이상하게 바라보지만, 점차 거기에 동화되고 마침내 ‘앤드류’의 인간 행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가장 비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에너지 충전의 순간에도 그들은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며 충전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데이트에선 노골적으로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처럼 느낀다.
그들은 따라 해야 할 실재하는 인간 대상도 없고, 인간을 따라 해야 하는 강제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그리고 즐겁게 인간처럼 행동한다. 이 작품은 여기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그저 인간처럼 행동하려는 로봇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또한, 로봇이 어떻게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는지를 서술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부분이 좀 불편했다. 전형적인 인간중심의 사고 그러니까, 모든 동물과 사물을 의인화하여 생각하고 인간의 행동양식으로 해석해야 안심하는 사고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을 좀 더 들여다보고, 결말을 몇 번 곱씹자 이 작품의 다른 의미가 떠올랐다.
‘나’와 ‘앤드류’가 공유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그들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되려는 몸짓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생성하고 품고 발화하는 과정의 행동양식이었을 뿐이다. 인간은커녕 다른 생명체를 접할 기회가 없는 그들에게 영화는 유일한 교본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호의, 그리고 그것이 점차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바뀔 때, 미처 프로그래밍 되지 않은 그런 생소한 경험을 외부로 출력하기 위한 예시는, 바로 영화밖에 없다. 영화 속 수많은 연인들. 사랑이라는, 예술문화 최대의 주제를 다룬 수많은 아름다운 영화들. 두 로봇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그 감정을 영화 속 연인들처럼 표현하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터이다.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을 따라 한 피조물이 아니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오롯이 우리 자신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두 로봇의 마지막 데이트에서 일어나는 감흥은 비극적 사랑의 애처로움이 아니라 복제가 진짜가 되는 순간을 목격하는 감동에 더 가깝다.
두 로봇이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나의 처음의 생각은 잘못됐다. 두 로봇은 인간처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두 생명으로서 온전히 존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