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어쩌면 기계에 들린 귀신일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 전, ‘로봇’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에 살던 사람이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현대에 발을 디뎠다고 하자. 우리는 그를 비밀리에 21세기의 대한민국으로 데려온다. 그를 곧바로 세상에 내보내면 혼절하고 말 테니 조용한 방에서 안정을 취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앞에 인공지능 로봇을 하나 가져다 놓는다. 음성인식으로 명령할 수 있는 스마트폰도 좋다. 과거에서 온 그는 이 물건이 어떤 원리로 움직인다고 생각할까. 제법 논리적인 문장을 늘어놓고 질문에 곧잘 대답하기도 하니 지능은 있는 듯하지만, 외형을 보니 그것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딱 보아도 살아있지 않을 듯한 물체와 대화하고 있는 그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이 물건이 무엇으로 작동한다고 보십니까.
대답을 듣기 전에, 그의 반응을 살피자. 그 사람은 의외로 태연할지 모른다. 과거에도, 말하는 물건의 이야기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도깨비가 된 가구의 전설부터 귀신이 들린 물건까지. 오히려 옛 사람들은 지금보다 물건에 영혼이 있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 곳곳에 영혼이 깃들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집을 지켜준다는 가신과 산을 지키는 신령. 하물며 뒷간신도 있는데 그깟 조그만 쇳덩이에 영혼이 깃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일찍이 고려와 조선에는 ‘가전체’라는 문학이 있었다. 술과 종이, 대나무와 꽃, 가위, 바늘, 자, 골무 등 사물을 의인화한 소설이었다. 선풍기가, 에어컨이, 텔레비전이, 냉장고가 말하지 못할 까닭도 없다. 물론 인간은 경험으로 안다. 혼령이 있는 물건을 만나기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인공지능을 처음 본다면 낯선 것에서 오는 공포가 있을 수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도 귀신 들린 물건은 무서웠겠지만, 간혹 아무 말 하지 않는 가구를 보고 있자면 그저 답답하지 않았을까. “11번 채널 틀어줘”라는 한 마디에 텔레비전에 척척 알아서 작동한다면 좋겠다, 이런 상상을 가장 처음 한 사람은 아마도, 귀신의 존재를 믿었을지 모른다. 인간과 대화할 수 있도록 어떤 물건에 깃든 하나의 존재를.
우스개로 영화에서 ‘시리야’라는 대사가 나오면 영화관 여기저기서 스마트폰들이 답한다는 시대가 되었다. 드라마에서 ‘진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진이야’라는 호명에 기가지니가 반응한다. 귀신 동력 가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공지능이 깃든 물건이 우리의 손에는 하나씩 들려 있다. 수십 수백만 개의 지니와 빅스비와 시리가 조그만 사각형 안에서 인간의 부름을 기다린다. 과거에서 잠시 시간을 빠르게 지나온 우리의 여행자에게 이 영혼들을 소개한다.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시키며 가만히 생각해 본다. 진짜로, 인공지능은 귀신을 닮은 데가 있다고.
하지만 인공지능은 전기를 먹는다.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은 전기로 돌아간다. 기기 자체를 돌리는 것뿐 아니라, 인공지능 데이터를 수집, 분석, 보존하는 데에도 전기가 든다. 인공지능은 말하자면 거대한 전기 덩어리다. 겉보기에는 작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불과한 그것들이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정말 귀신을 기계에 가둬버리는 게 친환경적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공지능은 전기가 없으면 작동이 불가하지 않은가. 귀신 동력 가전제품은, 글쎄, 귀신만 죽지 않으면 멈출 염려는 없다. 그런데 귀신이 죽는 존재였던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지금 발 앞에 떨어진 네모반듯한 종이 조각을 주워 보라. 휘황찬란한 이미지에 눈부신 개성의 폰트로 쓰인 글자를 읽어 보라. “충격! 귀신동력가전제품판매!”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귀신은 위험할 것 같지만, 친환경이라니 솔깃한다. 솔직히,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지금, 귀신과 함께 있으면 시원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구매는 어디서 하면 되나요. 손부채를 부치며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큰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 본다.
충.격.귀.신.동.력.가.전.제.품.판.매!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 솔직히, 거짓말 같다. 약간은 무서워진다. 전화를 걸어보면 장기매매 집단으로 연결되는 건 아닐까. 사채업자들이 받지는 않을까. 신종 보이스피싱일 수도 있다. 찌라시 같은 것에 함부로 전화 걸지 말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는데. 디자인부터 내용까지 미심쩍지 않은 구석이 없어 자세히 보니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동시에 무료체험도 가능하며 제품 기술의 향상을 도모할 피실험자도 모집하고 있다. 완제품이 나오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때 주인공 ‘나’의 뇌리에 스쳐가는 삶의 진실. 피실험자라는 말이 꺼림칙하지만 원래 그런 유의 아르바이트가 시급이 가장 세지 않은가. 홀린 듯이 전화를 걸어보니 다행히 보이스피싱도, 장기매매도, 사채업자도 아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귀신동력가전 피실험자 시급은 삼만 원. 늘 빠듯한 ‘나’의 주머니 상황에 걸맞는 금액이다.
귀신 동력 가전제품에 대한 의심. 아무리 봐도 수상한 찌라시에 적힌 더 수상한 글자들. 절대 전화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끝내 모두 무시하게 하는 것은 삼만원짜리 ‘시급’이다. 주인공은 돈에 이끌려 미지의 세계로 발을 디딘다. 모험가에게 여정을 떠나게 하는 것은 작은 호기심이다. 이 짧은 소설 안에서 주인공의 호기심은 “돈에 미친” 자신을 고층 빌딩 앞에 세워 놓는다. 아마 그곳은 놈들의 본거지…아니, 조금은 평범하지 않은 가전제품 판매업체 본사쯤 될 것이다. 건물 앞에서 주인공은 “겉은 생각보다 말끔한걸?”이라는 평범한 대사를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주석으로 그것이 아오오니(공포게임) 속 주문에서 비롯되었음을 귀띔한다. 빌딩 안에서는 어쩌면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고.
피실험자 신분으로 방문했으니 ‘나’는 시청각실에 다른 사람들과 모여 실험 설명을 듣는다. 귀신 동력 가전이란 무엇인지, 귀신은 어떤 방식으로 기계에 에너지를 제공하는지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설명을 듣는다. 여기에서 작가는 귀신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제시한다. 시청각실의 장면은 이 글이 소설로서 첫 번째 의미를 획득하는 부분이다. 직원의 프레젠테이션에 따르면, 귀신이 엔트로피의 변화에 관계 없이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 특유의 ‘한’이라는 정서가 근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생전의 ‘한’을 바탕으로 에너지를 생성한다는 귀신의 설정은 심리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던 ‘한’의 정서를 기술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한이 가득 서린 귀신을 가두는 데에는 ‘부적’이 사용된다. 회사가 발명했다는 ‘귀신포획술’’은 부적을 이용한 것이었다. ‘한’과 ‘부적’은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힘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영혼처럼 탈육신적이고 고차원적인 영역을 관장하거나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던 두 소재는 ‘귀신 동력 가전제품’이라는 독특한 상상을 통과하며 물리적인 특성을 얻는다. ‘한’은 귀신의 에너지원이 되어 인간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제공하고, ‘부적’은 귀신을 특정 공간 바깥으로 이탈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피험자들은 생각보다 기계적인 실험으로 귀신 동력의 효율성을 밝힌다. “둘 중 어느 상자가 더 시원한지 말해주세요”라는 첫 번째 질문은 귀신의 한기가 느껴지는 듯한 촉각적 감각을 준다. ‘나’의 단순한 선택만으로 밝혀진 것은 예상보다 섬뜩하다. “한이 더 강한 귀신(타살)의 한기가 한이 더 약한 귀신(자연사)의 한기보다 강함”. 그렇다면 ‘나’가 만진 두 개의 상자 중 하나에는 자연사한 귀신이, 다른 하나에는 살인으로 죽은 귀신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단순명료한 문자료 표현되기에는 상황이 평범하지 않다. 귀신으로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이 필수적일까.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정상품과 불량품을 감별하듯 귀신의 차이를 끊임없이 밝힌다. “물귀신과 일반 귀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귀신과 오래된 귀신”, “귀신들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가하며” 발생하는 파장은 ‘나’의 손에서 효용가치를 얻거나 잃는다.
귀신의 근원은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실험의 내용을 읽다 보면 왠지 윤리적인 질문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아무리 귀신이라도,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때는 사람이었던 그 존재에 고통을 가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물귀신인지의 여부로, 죽은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귀신보다 더 많은 동력 생산에 착취되도록 두는 것이 맞을까. 왜 그들을 도구처럼 대하는 것이 점점 불편해질까. 그들에게 ‘한때는’ 생명이 있었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독자들은 동물권을 비롯한 생명의 권리에 대한 논의가 대상에게 가해지는 ‘고통’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소설에서 귀신은 고통을 느낀다. 단지 죽지 못할 뿐이다. ‘귀신 동력 가전’이라는 자극적이고도 직관적인 제목으로 시선을 끌던 이른바 ‘친환경 에너지’가 사실 누군가를—그게 설령 귀신이라 하더라도—착취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피부에 와닿는 순간 섬찟해진다. 우리는 ‘친환경’처럼 매끈하고, 아름답고, 그럴싸한 이름 아래 잘 포장된 착취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나’와 같은 피실험자들의 노고로 회사는 점점 성장하고 텔레비전 광고를 하기에 이른다. 여전히 디자인팀이 없는 조악한 광고에 불과하지만, ‘귀신 동력’이라는 문구가 워낙 강력했는지 빠른 시간 안에 그 기술은 상용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회사가 커진 만큼 ‘친환경’이라는 이름 아래 묻혀 있던 진실이 드러난다. ‘귀신권’을 보장하라는 움직임이 생기고, 회사와 ‘귀신을 공급하는’ 하청 업체 사이의 관계가 밝혀진다. 이 많은 귀신은 어디에서 온 걸까. ‘타살’이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던 ‘나’의 말은 돌이킬 수 없이 많은 목숨을 앗아간다. 원한이 극에 달할수록 귀신 동력은 시원해진다니, 회사는 하청 업체에 살인을 부탁한 것이다. 끊임없는 귀신의 공급과 함께.
’나’는 에어컨으로부터 환청을 듣는다. “모른 척하지 마”, “너는 전부 알고 있잖아”. 인공지능은 더 이상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이웃이 아니다. 말하는 대로 응답하는 기계도 아니다. 귀신 동력 가전으로 대체된 집안 곳곳에서 한으로 똘똘 뭉친 목소리가 소리를 지른다. 귀신 동력 가전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그 안에 깃든 귀신들이 너무 많은 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임 당한 영혼들은 이제 자신의 한을 ‘동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뿜어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많은 죽음이 피실험자였던 ‘나’의 한마디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잘못은 ‘나’에게 있을까. 그것 또한 아니다. 방관을 한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근본적인 가해자가 아니다. ‘친환경’이라고 착취를 포장했던 회사는 ‘피실험자’라는 이름으로 ‘시급’을 받던 ‘나’에게 실험의 책임을 떠넘긴다. 그러나 ‘귀신 동력’ 가구를 만드는 데에 온전한 책임이 있는 것은 회사다. 그들은 거대한 자본을 굴려 피실험자들에게 귀신을 감별하게 했고, 그 결괏값에 따라 귀신을 만들었다. ‘나’보다 더 큰 잘못은 회사가 했음에도, 소설 속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건 ‘나’다. 작가는 귀신 동력 가전의 연구, 개발을 맡은 회사를 통해 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집단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형성한다. 결말에서 ‘나’의 죄책감 뒤에 숨은 것은, 진짜 잘못을 깨달아야 하지만 ‘귀신권’을 보장하라는 사람들의 시위에 침묵하는 거대 권력이다.
마치며
‘귀신 동력’이라는 기발한 상상으로 시작된 이 소설의 마지막은 평범한 일상 아래 묻힌 누군가의 고통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친환경’ 아래 숨겨진 귀신들의 고통, ‘피실험자’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더 큰 책임은 단편의 마지막 줄을 읽는 독자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귀신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구석에 쭈그려 앉는다”. 죄책감과 피로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아프다”고 기계에서 한을 내뿜는 귀신들에 둘려싸여.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야 그들의 ‘한’이 씻어질까. 귀신 동력은 절대 착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도 결국은 누군가의 고통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한 착취의 굴레 안에 살고 있다. 상대가 나를, 또는 내가 나를 감시하고 착취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매끈한 포장지로 잘 싸여 결과적으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이 된다. 설령 누군가 죽더라도 그의 마지막은 뉴스 한 줄로도 요약되지 않는다. 귀신처럼 투명해진 사람들의 목숨은 결과적으로 아무 눈에도 띄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실을 직면하는 것이 힘들더라도 누가 그것을 시작했는지,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숨겨진 곳에서 죽어가는 생명이 ‘친환경 기술’로 탈바꿈하지 않도록 애써 감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라는 이름의 사회다.
그러므로 먼 미래에 당신이 길을 걷다 휘황찬란한 찌라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 작은 종이조각 안에 쓰인 ‘귀신 동력 가전’이라는 말을 보게 된다면, 어떤 발전을 위해 희생된 생명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냉기를 뿜고 있다. 동력으로 쓰이기에는 너무 응축돼 있는 한이 그들의 안에 똘똘 뭉쳐 있다. 이름없는 고통은 지금도 우리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저물게 한 귀신 동력. 친환경 가전제품이라는 그럴듯한 모습 안에 숨겨진 진짜 ‘동력’의 실체를 아는 순간, 당신에게도 그들이 내는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우리는 살고 싶었어’.
’고통받고 싶지 않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