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발전한다면 사후세계의 비밀도 밝혀질까. 그 둘은 너무도 관련이 없어서 우주의 끝과 끝만큼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죽음 이후의 인간은 아무것도 없이 공평하게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음을 지난 사람의 몸은 시간의 섭리에 따라 빠르게 사라지고 풍화된다. 물리적으로 보면 죽음이란 인간의 생명활동이 멈추는 시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곁에 있던 누군가가 어느 한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 그와의 추억이 연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강렬한 감정의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 떠난 사람을 붙잡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혹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고통스러워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거나 더 아프게 남은 시간을 보낸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그 상처의 누적은 끝내 ‘사후세계’로의 열망을 만들었다. 나와 당신이 죽더라도 단절되지 않는 세상. 그곳에서 우리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누군가의 소망에 의해 만들어졌을 그 세계는 세월이 흐르고 많은 사람의 기대 속에서 정교한 모습을 갖춰 갔다. 단순히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부터 크고 웅장한 천상의 나라를 상상하는 사람까지. 공상과 바람(wish)과 종교는 그들이 원하는 사후의 모습을 그렸고, 많은 공감을 받은 것들은 글과 그림으로 남아 생명을 얻었다.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과 무속의 사후관이 모두 다르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바람에서 출발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것, 더 나아가 지상에 두고 갈 수는 없는 것으로부터.
인간은 이별을 슬퍼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앞으로 닥칠 단절에 공포로 몸서리친다. 어떤 죽음도 당연하지 않기에, 당신은 나와, 나는 당신과 이별 이후의 재회를 소망한다. 이런 바람은 과학이나 기술이 갈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죽음 이후의 삶을 믿고 그것을 맹신하지 않더라도 즐길 줄은 안다. 앞으로 당분간은, 어쩌면 영원히 죽음 이후의 삶을 바라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지만, 없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런 소원이 명맥을 이어갈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과학이 증명한 사후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우리의 영혼이, 사후의 몸이 가는 곳이 과학적으로 증명된다면. 그리고 그곳에 우리의 기술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시점이 온다면. 인간만 산다고 하기에는 너무 넓은 이 우주의 한 모서리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숨어 있다면. 그곳을 처음 발견한 인류는 그토록 바라던 천국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까. 우리와 같은 모습의 존재가 살고 이 세상과 엇비슷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천국은 신비로워야만 한다고 믿던 사람들의 눈앞에 너무도 평범한 사후세계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을까.
태초에 천국이라 불린 행성이 있었다
이 천국은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하늘에 있는 하나의 나라이자 대륙이며, 행성이다. 극한의 하늘을 통과하면 우리는 우주를 마주한다. 그 우주의 어딘가에 사후세계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토록 정확한 ‘하늘 나라’가 어디 있을까. 그곳은 우리의 영혼이 돌아가는 곳이다. 지구와 흡사한 조건, 비슷한 사람들, 하지만 지구에서 이천 광년 떨어져 있어서인지 발전은 조금 느리다. 기술 혁신의 속도가 시차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 행성은 그저 생긴 지 얼마 안 된 지구형 행성처럼 보인다. 윤지웅 작가의 단편 〈수학여행〉 속 인간들은 이것을 또다른 지구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발견된, 지구와 아주 비슷한 행성이라고. 그 행성은 머지 않아 관광지가 된다. 충분한 기술이 발전된 미래에 이천 광년을 이동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퐁당퐁당 돌다리를 건너듯 시공간을 넘어 이동하면 도착하는 행성 테티스. 경주에 가듯 자연스럽게, 지구에서 수학여행을 떠난 한 무리의 아이들이 행성 테티스에 도착한다.
우리는 행성 ‘테티스’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후세계의 기원부터 짚어왔지만, 이 소설은 아이들이 테티스에 도착한 시점부터 시작된다. 고대의 소망에서 아주 먼 미래까지 뻗어있는 죽음의 역사 중 한 곳에 출발점을 꽂는다는 것. 길쭉한 시간선의 한 곳을 단번에 고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과거도 현재도 아닌, 미래를 선택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있어야만 가능한 어떤 ‘그리움’을 소설로 완성하기 위해서다. 〈수학여행〉을 모두 읽고 나면 그제야 플롯의 순서를 구성하는 작가의 감각이 심상치는 않다는 게 체감된다 그것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 읽어야만 하는 하나의 이유다. 이 단편을 쓴 작가는 소설에 가장 필요한 시공간을 적절히 떼어온다.
이 〈수학여행〉의 중심 공간인 행성 테티스는 사후세계다. 그것의 정체가 소설에 드러나는 순간 대단한 매력을 끌 수 있지만, 작가는 마지막까지 행성의 비밀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우주에 조성된 영혼의 안식처를 끝내 공개하지 않기란 어렵다. 얼마나 매력적인 곳인가. 오히려 그런 공간을 생각해내면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면, 공간의 특성을 어필하고 싶었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입을 다문다. 그 매력은 끝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시한부인 설희의 인생과 그가 가지 못했던 수학여행. 사실은 테티스가 사후세계일지 모른다는 가정이 소설의 결말에서 하나의 점으로 모여야 한다. 작가는 이 점을 알아채고 결말까지 죽음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의심할 만한 근거는 한 가지. 설희가 몸이 아파 수학여행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방점이 결말에 찍힌 소설은 처음과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처음의 얼개를 성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끝과 시작이 동일하게 중요하다. 윤지웅 작가는 〈수학여행〉의 처음에도 끝과 동일한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 SF를 가져온다. 다소 허구적이지만, 반드시 실현되었으면 하는 기술. 외은하 여행을 가능케 하는 징검다리 항해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잡아끈다. 돌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공간을 건너뛰다 보면 어느새 가늠할 수도 없던 우주가 눈앞에 펼쳐진다.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 기술의 등장은 독자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뿐 아니라 그들이 소설에 집중하게 한다. 지금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하는 우주의 먼 곳에 단순히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할 수 있는 미래는 충분히 멋있고 아름답다.
덕분에 테티스는 잠시 이천만 광년 떨어진 지구형 행성으로 둔갑한다. “우주에서 지구 외 행성 중 최초로 생명체가 발견된 행성”이라는 설명 아래 그곳의 본질은 완벽히 숨는다. 독자는 작가가 정해 놓은 길을 따라 걸으며 테티스를 구경한다. 지구보다 기술 발전이 더딘 그곳에 ‘견학’을 온 학생들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채 관광한다. 선생님은 외은하인과의 접촉을 엄격히 금한다. 하지만 이 세계를 진실을 완벽히 숨기는 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기에, 평범한 지구형 행성의 가면에 의도적인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설희와 감각 공유를 하던 별아의 작은 일탈행위에서 비롯된다. 안전하게 보이던 수학여행은 일순간 비밀스러운 추리 공간으로 비뀐다. 동굴에 그려진 벽화. 벽화에 묘사된 익숙한 물체들. 지구보다 기술 발전이 더딘 그곳에 절대 존재할 수 없는 물건들이 그림의 곳곳에 놓여 있다. “테티스의 호모사피엔스 근연종인 외은하인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라는 선생님의 당부가 무색하게 별아는 외은하인의 그림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그 그림에 담긴 의미룰 설희와 추론한다. 수학여행의 처음부터 별아와 감각 공유를 해온 설희는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 준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베이스 캠프에 강제 귀환하게 된 다음에도 별아는 벽화를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이 소설에서 첫 번째 벽화를 발견하기 전후로 강조되는 것은 외은하인과 인간의 유사성이다. 그들은 날것의 육체 관계를 하고 벽에 그림을 그린다. 인간과의 ‘근연종’이라는 말로 생물학적인 유사성도 언급된다. 외은하인은 인간과 다를 것 없이 묘사된다. 인간종의 모습을 익숙하게 알고 있는 독자들은 외은하인을 상상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해한다. 어째서 이천 광년이나 떨어진 행성에 호모 사피엔스의 근연종이 생기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별아가 두 번째 벽화를 찾아갔을 때 밝혀진다. 첫 번째 방문과 달리 두 번째에서 별아는 외은하인을 마주친다. 그리고 그가 크루아상과 유사한 물체를 그리는 장면을 보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는다. 처음보다 강렬한 경험은 별아에게 더 강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별아는 끝내 다시 스텔스복의 에너지 부족으로 귀환한다.
이후 뜻밖의 전개가 이어진다. 설희가 별아에게 감정 공유를 끊겠다고 하는 것이다. 둘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던, 수학여행을 내내 함께하던 감정 공유를 끊는다는 것은 이야기의 큰 변곡점이다. 설희는 ‘진솔한’ 이야기를 별아와 하기 위해 감정 공유를 끊는다. 언뜻 보기에는 모순되는 제안 같지만, ‘진솔’한 마음이 정제된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설희는 그리 이상한 말을 한 게 아니다. 날것의 감정은 날카롭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다. 우리는 오히려 덜 감정적일 때 솔직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설희는 그런 상황을 원했던 것이다. 완전히 자신의 감정을 정제할 수 있는 시간을. 설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뜻밖이다.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별아와 감정 공유를 하게 되었을 때, 수학여행에 같이 가는 기분이 들어 기뻤다는 것. 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 설희가 홀로 남은 자신의 마음을 채워줬다는 것. 비록 상호간의 좋은 마음에 시작한 감정 공유는 아니었지만, 이런 진솔함이 정제되어 나오는 순간 둘은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된다.
둘의 고백이 끝난 후 테티스의 진실이 밝혀진다. 외은하인과 접촉했던 기록을 바탕으로 설희는 번역기를 돌렸고, 번역기가 내놓은 외은하인의 중얼거림은 ‘기억’이라는 단어였다는 게 드러난다. 이 소설은 설희와 별아의 빠른 대화로 행성에 대한 결론을 내려놓고 번역기가 ‘기억’이라는 단어를 결괏값으로 산출하는 결말을 따랐다. 그러나 이런 진행은 ‘번역기’라는 좋은 소재가 눈에 띄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별아와 설희의 대화를, 테티스에 관한 추리를 조금 더 개연성 있고 진지한 톤으로 다듬은 후에 번역기로 ‘기억’이라는 단어를 밝혀내는 장면 뒤쪽에 배치하는 것은 어떨까. 번역기를 돌리고 ‘기억’이라는 단어가 나온 후에 별아와 설희가 테티스의 정체를 조금씩 추론해가는 것이다. 번역기가 인간의 추리를 돕는 시작점을 제공한다면, 그것이 등장하는 이유를 분명히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SF적인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강화할 수 있다.
분명 ‘테티스’는 하나의 행성으로서도, 스토리텔링의 공간으로서도 훌륭하게 조성된 사후세계다. 인간이 멋모르고 그곳에 발을 디뎌 관광지를 만들었지만, 나는 이곳이 소설 안에서나마 실재하는 사후세계였으면 좋겠다. 좀 더 확실하고 명확한 방법으로, 이 행성이 사후세계라는 것이 밝혀졌으면 좋겠다. 잔잔하지만 의미있는 톤으로.
지금까지 이런 사후세계는 없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맺으며
김초엽의 단편 「공생 가설」은 지구에 찾아온 외계 생명체가 인간 아기의 생각을 지배하며 자신의 고향 행성을 그리워한다는 독특한 발상으로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향수’를 표현했다. 〈수학여행〉을 읽으며 「공생 가설」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둘 다 우주와 사람의 마음을 연관짓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내면은 우주처럼 미지의 공간이다.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깊이는 어떠한지 완전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주는 작지만 알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보듬기에 적절한 재료다. 김초엽은 그리움을 가진 존재를 인간의 내면에 넣었지만, 윤지웅 작가는 인간 내면의 그리움을 테티스라는 행성으로 보냈다. 들어오는 방향이든, 뻗어가는 방향이든, 확실한 건 우리에게 그리움이 있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그리고 미지의 장소에 대한.
더는 슬프지 않을 우리의 죽음을 위해 이 짧은 소설의 배경이 큰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작고 서투른, 그러나 용감한 우리의 주인공들도. 우리는 어디선가 만난다. 이 지구가 아닌 우주에서라도. 관광지인 줄로만 알았던, 수학여행지에서라도.
지구에서 행성으로 불어드는 영혼의 바람(wind), 그것은 한때 살아있던 이들의 바람(wish)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