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광고를 본 적이 있다.1“제 이름은 김소희입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영상은 실제 청각장애인 김소희 씨와 그의 가족 사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광고의 요는 청각장애인 김 씨의 목소리를 AI 기술을 통해 복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광고 속 기술자들은 가족의 목소리와 소희 씨의 구강 구조를 분석해 김 씨의 것이라 예상되는 음성을 만들었다. 이 영상을 보며 많은 사람이 기적을 본 듯 감동했고 해당 광고를 만든 통신사는 ‘따뜻한 기술’의 발전을 소비자에게 확실히 각인하는 효과를 얻었다. 영상 속 김 씨와 가족들이 흘리는 눈물은 ‘사라졌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음을 여과없이 보여주었고, 기술의 발전이 그렇게 차갑지만은 아닐 것이라는 낙관론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이 광고가 등장한 지 2년 여가 흐른 지금, 장애인 당사자뿐 아니라 대중들에게서도 이 광고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광고를 보는 내내 분명히 감동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음에도 어딘가 찝찝함을 감지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직접적인 논평을 시작한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이었다. 먼저 농인 유튜버 하개월은 유튜브 채널 ‘당장만나’에 게시된 영상2을 통해 이 광고에서 보이는 ‘오디즘(청인 중심 사회에서 농인에게 구화를 강요하는 것)’을 언급했다. 농인도 분명히 그들의 언어인 수어가 있지만, 광고에서는 수어가 ‘언어’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광고 속 김씨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기획자들 또한 나쁜 의도로 이 광고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인이 중심되어 기획한 프로젝트인 만큼 이 광고가 오디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소설가 김초엽은 작가 김원영과 공저한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가지니가 김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다”. 농인이 평생에 걸쳐 지적받는 발음의 어눌함은 비장애인들이 “왜 입모양이 잘 보이게 말하지 않는지, 왜 그렇게 입을 불분명하게 움직이는지”로 치환되지 않는다.3
위의 사례에서 보이듯, 여전히 장애인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은 편향적이고 왜곡되어 있다. 이런 경향은 장애인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모든 관점으로 확대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무인화, 비대면이 새로운 시류가 됨에 따라 키오스크의 사용이 급증했다. 이 기계의 편리함은 어디까지 한정되어 있을까. 대부분의 키오스크는 세로로 긴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직립한 성인의 키에 맞춰 설계된 키오스크에서 키가 작은 어린이나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선택하는 메뉴에 한계가 생긴다. 눈을 감고 키오스크를 사용해보자. 우리는 키오스크는 버튼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없다. 대체로 음성 해설 기능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시각장애인에게 키오스크의 접근성이 매우 낮음을 증명한다. 기술 소외계층이 키오스크를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일정 시간의 교육이 있지 않은 이상 그들에게도 기술의 편리함이 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보다 더욱 기술이 발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장애와의 진정한 조화를 이루게 될까. 아니면 더욱 정상성을 공고히 다지는 사회에 살게 될까. 삶이황천길 작가의 단편 〈도덕적 관점〉은 기술의 도약과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꾀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알맞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개발된 로봇 한 대와 장애를 가진 노인 엘렌의 짧은 이야기에서 독자가 감지하는 기시감은 ‘그들’의 삶이 우리와 얼마나 비슷한가에서 출발한다.
불편한 편의성
〈도덕적 관점〉의 배경은 장애 자활 보조 휴머노이드 QI-9가 개발된 시대다. ‘여울’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휴머노이드는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노인 엘렌에게 이동의 편의성을 제공한다.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휠체어 대신 엘렌의 휴머노이드는 그녀를 번쩍 들고 이동할 수 있다. 외국어 실력과 백과사전을 탑재해서인지 노인의 말동무 노릇과 손녀의 친구 노릇도 톡톡히 한다. 이 휴머노이드가 개발된 미래는 꽤 낙관적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된 사회처럼 보인다. 계단을 무리 없이 지나다닐 수 있고, 어떤 길에서도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여울은 이 사회에서 점점 더 소외되는 기분을 느낀다. 이 기분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소설의 초반에 인간과 로봇의 이질감을 보이는 장면을 배치한다.
엘렌의 손녀인 예빈이 여울에게 숙제를 부탁한다. 하지만 여울은 예빈의 의도대로 숙제를 정확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울은 인간의 나이에 따른 지식 수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탑재된 사전 속 어려운 정보를 열 살의 수준에 맞추지 못하고 그대로 숙제로 써서 내버린 것이다. 엘렌은 여울에게 인간이 받아들이는 지식의 양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는 세대나 연령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는 설명을 해준다. 물론 이 장면은 여울에게 숙제를 맡겼다가 낭패를 본 예빈의 입장에서, 또는 그런 예빈을 우회적으로 유쾌하게 훈계하는 할머니 엘렌의 입장에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되어야 하는 건 여울의 행동이다. 여울은 이런 엉뚱한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과 완전히 융화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그후 여울은 엘렌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을 조금씩 이해해 간다.
엘렌은 예빈과의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 장을 보러 향한다.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엘렌이 집밖으로 나와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엘리베이터 속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문 너머에 있는 엘렌을 보자마자 ‘닫힘’ 버튼을 누른다. 커다란 기계를 동반한 엘렌을 태울 자리가 엘리베이터에 없었는지, 아니면 엘렌이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이 문을 바로 닫았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들의 행동에 서린 ‘매정함’이 있었다는 점이다. 엘렌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자 여울에게 계단을 타고 가자고 제안한다. 여울은 무리 없이 엘렌을 안고 계단을 내려간다.
엘렌이 집에서 나와 두 번째로 마주한 건 예빈이의 학교다. 이곳은 장애 자활 보조 휴머노이드가 개발되었을 정도로 발전된 세상에서 아직 대중의 인식은 이전보다 나을 것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예빈의 학교에는 장애 학생을 위한 엘리베이터가 아닌 소수의 QI-9이 배치되어 있다. 모두의 이용에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장애 학생 전용’ 로봇을 배치하는 학교의 선택은 오히려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의 경계를 뚜렷이 한다. 여울과 같은 종류의 휴머노이드는 소설 속 세상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융화하는 게 아닌, 여러 갈래로 분화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너희가 우리를 계단으로 다닐 수 있게 하잖니. 그러니 너 없이 내가 계단을 내려가지 못하면 사람들은 계단이 문제가 아니라 QI-9이 없는 내 문제라고 생각하거든.”
엘렌은 이 대사에서 QI-9의 궁극적인 문제를 하나 더 짚는다. 결국 이 휴머노이드는 이동권이 제한된 장애인에게 죄책감을 부여한다. 개인적, 경제적인 이유로 휴머노이드를 구비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동권은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이동 제한은 오히려 그들이 자초한 것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단순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영역에서만 기술 낙관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이 소설은 기술, 경제적으로 소외되는 모든 계층으로 논의 대상을 확대한다. 여울은 휴머노이드를 구비했음에도 사회적 낙인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 대부분을 차지할) 휴머노이드가 없는 장애인들은 이동권이 철저히 제한된 채로 사회적 낙인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여울은 자신이 ‘자활 보조’ 휴머노이드이기에 QI-9이 없는 세상은 ‘당연히’ 불편할 것이라 예측한다. 로봇의 단순한 판단 능력은 ‘불편’과 ‘편의’로만 세상을 규정한다. 그러나 ‘불편’과 ‘편의’의 사이에는 수많은 감정이 들어 있다. 인간의 감정은 철저히 연속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편리한 사회나 완전히 불편한 사회는 규정될 수 없다. 특정 휴머노이드의 개발로 세상이 편리해질 것이라 생각한 대부분의 비장애인이 있는 반면, 그러한 사회의 도래를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여울은 회사에서 주입한 메시지를 기계적으로 찍어내면서 자신의 편의성을 강조하지만, 엘렌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엘렌은 여울과의 대화에서 이런 미래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 외에도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바라는 미래를 제안한다. 자활은 “스스로 살아간다”라는 의미이므로 모두의 진정한 자활이 이루어진다면 자활 보조 로봇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QI 시리즈는 자기 소멸을 전제로 한 휴머노이드”라고 이야기하는 엘렌은 자활 로봇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는 세상을 상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두의 자활이 완성되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 예측한다. QI 시리즈는 이용자에게 더 많은 의존을 유발하기 때문에 ‘자활’과의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 로봇을 구매했지만, 엘렌은 로봇이 없이도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편적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날에 비로소 QI-9의 효용성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우리의 차원을 좁히는 시도
이처럼 소설의 마지막까지 여울과 엘렌의 생각에는 많은 차이가 보인다. 여울은 인간과 전혀 다른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인간과 자활 휴머노이드의 공생 가능성, 그리고 더 나아가 둘의 화해 가능성을 열어 둔다. 만약 이 소설이 로봇과 인간의 경계를 뚜렷히 하고자, 그리하여 둘 사이의 화해불가능성을 다루고자 했다면 작가는 여울의 이름을 모델명인 QI-9으로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엘렌은 자신의 로봇에게 ‘여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친근하게 대한다. ‘QI-9’에게 명령을 내리는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여울이’의 할머니로서 보이는 엘렌의 친근함이 소설 곳곳에 묻어난다. ‘여울아’라고 로봇을 부르는 엘렌의 목소리는 우리네 할머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엘렌과의 대화에서 여울은 변화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저의 사고와 여사님의 생각이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옆에서 모시는 동안 최대한 이 차이를 좁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울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한 번 엘렌과의 생각을 좁히려는 시도를 하겠다고 말한다. 엘렌은 이 말이 프로그래밍된 대사일지 여울의 “자율사고 과정”이 만들어낸 진심일지 고민한다. 작가 역시 여울이 이 말을 뱉은 의도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자활 보조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생각이 좁혀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자활’의 정의가 명확히 세워지고, 어떤 ‘도덕적 관점’으로도 그것이 판단되지 않는 세상. 모두의 자활이 명확히 보장되는 세상은 자활을 ‘제공’한다고 여기는 어떤 집단과 그 집단이 생각하는 ‘수혜자’의 개념이 무너질 때 완성될 수 있다. 이런 세상의 도래는 여울이 말한 ‘차원을 좁히는 시도’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여울의 대답에 이어 엘렌은 다시 자신의 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경험을 한다. 여기에서 작가는 마음의 차원을 좁히려는 시도가 아직 요원함을 보인다. 앞에 선 장애인을 이해하려는‘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황급히 문을 닫는 인간의 모습. 그것은 앞선 여울의 대사와 대비된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마음의 간격을 좁히지 못하는 건 로봇이 아닌 사람이었다. 이렇게 로봇과 사람의 위치는 잠시 역전된다. 로봇만큼도 동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 ”이 세계에서 자활은 가능한가”라고 씁쓸하게 묻는 엘렌의 목소리는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어떤 ‘사고실험’일지도 모르겠다.
마치며
이 소설은 ‘도덕적 관점’이라는 다소 직관적인 제목과는 달리 섬세하고 유연하게 하나의 세상을 그린다. 그 세상은 기술적으로 진보했으나 낙관적이지 않다. 기술낙관론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한 존재의 자활이 도덕적 관점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이것은 지금의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한두 사람이 아닌 모두가 이를 고민할 때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무시했던 수많은 목소리이며 보지 못했던, 애써 피해왔던 세상이다. 그것을 직시하는 게 조금은 고통스러울 수 있겠으나, 이 ‘고통’은 온몸으로 그것을 감수하던 사람들에게 사회 전체가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활 로봇이 등장할 필요가 없는 시대로, 진짜 ‘도덕적 관점’이 판단해야 할 더 많은 문제들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엘렌이 바라던,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어떤 세상’이 빠르게 도착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