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에는 일단 스포일러 같은 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태호 작가님의 소설 <사라진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을 인지하는 순간에서 오는 공포를 다루는 소설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시간의 속도를 느끼는 것도 주관적입니다. 재미있는 일을 할 때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지만, 지루한 일을 할 때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느낌을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애초에 시간은 상대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작 중 묘사되는 그 상대적인 공포가 진짜 공포인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개인의 주관을 기반으로 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진 소설은 진실과 거짓 양가성 사이에서 진자 운동하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 서사를 구성하면서 부터 입니다. 인과의 순서대로 쓰여진 개인의 사건들을 조직하며 우리는 그 것들을 인지합니다. 우리가 시간이 사라졌다, 라고 느끼는 것은 인과 사이의 무언가가 빠졌음을 자각할 때 입니다. 작 중에서 묘사되는 서사의 균열은 8시와 10시 사이 무언가 했음은 분명하지만 그 것이 기억나지 않는 상황입니다. 화자는 이 시간의 균열을 관찰하기 위해 핸드폰으로 기록하는 행동을 취하지만, 그 상에 비친 나는 혼자서 멀쩡히 그 곳에 ‘있었을 뿐’입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 속의 나와, 내가 인지하는 시간 속의 나. 그 간극은 결말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그 것은 강박이나 확증 편향처럼 마치 정신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소설의 공포는 그 간극을 ‘어떤 존재’가 불러일으킨다는 화자의 추측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화자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증상을 호소한다는 묘사는, 일반적인 정신적인 문제라는 지점을 짚을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이러한 침탈 행위가 유구함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 SF영화를 보며, 시간을 강탈하는 외계인 소재를 즐기는 것은, ‘어떤 존재’를 망상하게 된 계기로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실제로 그런 존재들이 있음을 자각하는 계기로도 볼 수 있을 터입니다. 그리하여 최후에 정체 모를, 몇 백 년 간 사태를 연구해온 ‘선생님’을 제시할 때, 이 모든 전개는 크툴루 신화의 ‘인지를 초월한 존재’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것은 아마도 인지를 초월한 존재이니, 인식하는 순간 미쳐버리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겠죠.
하지만 토도로프가 주창한 환상적인 공포가 으레 그렇듯이, 진실과 진위 사이에서 망설일1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여진 소설은 화자의 주관과 의식에 침잠할 뿐이기에 ‘객관적’인 근거들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소설은 미지의 존재로부터 침략당한 개인의 공포인지, 혹은 단순히 강박적인 습관으로 인해 피폐해진 개인을 다루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그 둘 사이에서 망설이게 됩니다. 이 환상에서 불러오는 기묘한 감각은 공포로 치환되어 우리에게 묘한 강박을 불러일으킵니다.
과연 무엇이 진짜일까요. 진실과 환상사이에 놓여진 공포. 이태호 작가님의 소설 <사라진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