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요즘엔 흔히 볼 수 있는 말이다. 옛날이라고 해봤자 멀지도 않다. 2~30년 전만 해도 사람이 100세까지 사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급격하게 바뀌면서 사람들의 수명도 급격하게 달라졌다. 2022년 6월 15일 현재, 한국의 평균수명은 83.5세다. 거기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100살까지는 거뜬하게 살거라고들 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수명이 늘어난 데는 무엇보다도 첨단 의료기술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한 채 오래 산다. 그리고 아직 불로장생을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수명은 늘어났다는 말은 그만큼 일상생활을 오래 지속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을 유지에 있어서 돈과 건강은 필수적인 요소다. 둘 중에 하나라도 부족하면 노년이 힘들어진다. 아무리 관리를 잘 한다고 한들, 한창 젊을 때의 건강과 나이 들었을 때의 건강은 같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은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고.
늙어서도 건강하게 생활하려면? 돈이다. 일단 돈이 있어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든, 식단을 바꾸든, 운동을 하든, 사교활동을 하든 할 수 있다. 만약 없으면? 그때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영생의 시대>의 주인공인 지후도 마찬가지다. 영생시술을 받았지만, 신체의 노화는 막을 수 없었기에 관절염, 백내장, 성대결절 등 다양한 노화질환에 시달린다. 낡은 걸 억지로 움직이려니 고통은 당연히 1+1으로 따라온다. 몸이 아프면 자연스럽게 마음도 약해지는 법. 지후는 평범한 일도 꼬아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니 더더욱 힘들고 지쳐 마음이 약해지고 다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진다. 결국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친 어느 날, 지후는 눈물을 터뜨리며 엄마를 찾는다.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힘들 땐 엄마라는 단어를 찾기 마련이니.
엄마.
오랜만에 기억해 본 단어다. 하지만 엄마가 기억나는 건 아니다. 그냥 이렇게 어떤 추억의 조각으로만 남아있을 뿐.
하지만 이런 추억의 단편 속 엄마란 그보다는 조금 더 감정적인 단어다.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거 같은 감정. 하지만 두 세기가 넘는 세월 속에 그런 감정을 기억한다는 건 벅찬 일이다. 스마트 클라우드조차도 한 세기가 넘은 사진은 지워버리는데 사람의 뇌가 그런 걸 기억할 리가 없지.
하지만 기억이 흐릿해도 뭔가가 존재했던 흔적이 있다. 상처났던 자리의 피가 멎어도 한참을 더 아픈 것처럼.
내가 깨소의 먼지받이를 돌보는 것처럼, 누군가가 내 아픈 곳을 돌봐준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괜찮냐고 누가 한번만 물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엄마가 보고 싶다.
친구도 없이 고립된 채 집과 직장을 오가는 쳇바퀴같은 생활만 하던 지후의 고독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람은 사회적인 생물이라고들 한다.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와 상호교류를 하지 못한다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새 안으로 곪아들어간다.
자기가 외로운 줄도 모르고 외로워하던 지후는 울음을 터뜨린 날 한 모자를 만난다. 원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엄마와 궁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지후에게 새로운 바람이 되어주었다. 점점 생활반경을 넓혀 도서관에도 가보고, 다른 아이들이 노는 곳도 지켜보고, 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직장에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지후는 자신의 삶을 차근차근 돌아본다. 원강과 궁이의 가족이 사는 모습도 오랫동안 지켜보던 지후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누군가 내 죽음에 슬퍼할 수 있을 때 죽는 것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후가 삶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했던 생각이자 이 작품의 핵심 주제다.
우리는 누구나 젊음을 유지한 채 오래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불로장생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인지는 잘 생각해봐야 할 문제지 않을까. 지후도 영생시술을 받을 땐 자신이 그렇게까지 고독하게 살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고리타분한 말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수명은 다 이유가 있으니까 이렇게 정해진 것이 아닐까? 자연의 섭리라는 말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여기서는 그 말을 쓰고 싶다.
관절염으로 아픈 무릎을 움켜쥔 채 부정적인 말을 퍼붓던 지후가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쉬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