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목영 작가의 연재 장편 《잊힌 신이 내리는 계절》의 1부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
여기 이 따스한 계절을 즐기기에는 너무 많은 짐을 진 아이가 있다. 대대로 정계에서 유력했던, 몰락하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 힘이 유효한 집안에 태어나 가문을 이어받기 위해 길러진 아이.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그러나 이미 또래의 여아들과는 많이 다른 길을 걸어온 아이. 한편으로는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에 몸을 담고 있으며, 부조리에 대응하는 것이 몸에 배었고 하나의 퍼즐조각처럼 세상의 일부에 맞춰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아이. 동시에 자신이 자란 에레드 가문의 분위기와는 어딘가 달라보이는 아이.
목영 작가의 장편 소설 《잊힌 신이 내리는 계절》의 주인공 이벨린 카스텔 에레드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계에 한참 이질적인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것이 익숙하다. 벗어나고 달아나고 도망치는 게 몸에 배었다. 가만히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수직적 권력의 유지에 힘쓰기보다는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지만 언젠가는 가문을 이어야 하고, 작위를 받아야 하는, 그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을 따라야 하는 인물이다.
《잊힌 신이 내리는 계절》은 ‘여주 혁명 판타지’라는 하나의 장르로 오랜 시간 연재를 이어온 소설이다. 그 안에는 주인공 이벨린 에레드가 정치판과 개인의 삶을 저울질하며 살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학교, 집, 영지, 길거리 등 다양한 공간을 오간다. 이 소설의 1부는 그런 이벨린 에레드가 나아갈 여정의 출발점이며, 그의 동료와 지지자들, 그리고 적대자들의 등장을 예고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시작이 비범한 이 청년 이벨린 에레드는 자신의 혁명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혁명, 그 이전의 사람들
처음 ‘여주 혁명 판타지’라는 장르명을 보았을 때 최근 대중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다양하게 창작되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다는 점이 크게 개성적이거나 흥미롭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 즉 이 소설이 처음 발을 뗀 2018년은, 2016년 출간된 『82년생 김지영』을 필두로 페미니즘 창작물이 활발히 리부트되던 시기였다. 당시에 ‘여주 혁명 판타지’를 읽는 독자들은 이 작품의 장르명에서 여성 주인공의 줄임말인 ‘여주’라는 단어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때 ‘여주’라는 단어는 그것 자체로 힘이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지금, 우리는 페미니즘 소설 이후를 기대하고 있다. ‘여주’라는 말이 평범하게 느껴진다는 건 이미 그것 자체가 창작에서 하나의 기본이 되었고 더 다양한 요구가 발생하고 있다는 신호다. 그러므로 독자로서 여성 주인공 이상을 갈망하게 되는 이 감정은 최근 여성 주인공의 다양화에서 발생한 긍정적인 당연함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 너머의 시대가 도래하는 중이다. 지금은 가장 널리,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이 여성의 이야기이며, 그것이 창작물의 주류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시기이니만큼 독자들은 이제 ‘여성 주인공’이라는 타이틀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
이때 적절히 기능할 수 있는 단어는 ‘혁명’이다. 목영 작가는 이 점을 예리하게 파악해 자신의 소설에 여주 ‘혁명’ 판타지라는 장르를 확고히 정체화했다. 보통의 ‘여주 판타지’로만 장르가 설명된다면 지금의 독자는 내용에서 신선함을 찾아야 하겠지만, ‘혁명’이라는 단어가 붙음으로써 시원하고 대범한 여성 영웅 주인공의 등장을 다시 한번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작가는 ‘혁명’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를 영리하게 활용해 장르 자체의 신선도를 높인 것이다.
이렇게 ‘여주 혁명 판타지’라는 장르를 이야기 외적으로 이해했다면 소설의 배경을 살펴보자. 《잊힌 신이 내리는 계절》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그 배경에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의문이 드는 점이 있다. 판타지 장르는 작가의 상상에 따라 다채로운 빛을 띨 수 있는 만큼 많은 작품에서 이미 여성혐오를 전복시키려는 시도를 해왔다. 오히려 지금은 여성이 계층, 계급적으로 상위에 있는 사회, 남성이 복종하는 사회 등 실험적인 인물 구도가 대중에게 호응을 얻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이 소설의 장르는 ‘여주 혁명 판타지’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여전히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사회적 배경을 작가가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을 읽기 전에는 이것이 자칫 장르에 가졌던 독자의 기대를 반감하지 않을까 싶은 우려도 있었다.
만약 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면, 이미 이 소설의 평이 좋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잊힌 신이 내리는 계절》은 누군가의 ‘인생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목영 작가는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가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될 때 보다 극적인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소설 전반에 걸쳐 꼼꼼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증명한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소설 속 이벨린이 마주하는 여러 난관의 기저에 차별적인 사회 분위기가 단단히 녹아 있음을 감지한다.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혐오에 1차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이후 깊이 마음에 자리잡는 감정은 우리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기시감이다. 말하자면 이벨린이 살아가는 가상의 세계는 여전히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현실의 연장이며 그것은 이 소설의 장르가 여주 ‘혁명’ 판타지이기에 가능한 또 하나의 특징이다. 새로움보다는 익숙함 안에서 이루어질 혁명을 작가는 이야기 안에 정교하게 구축한다. 독자가 살아가는 현실과 유사한 배경의 설정은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 그 안에서 분투하는 이벨린의 혁명이 사회적 혁명일 것이며, 그것은 계급 간 혁명뿐 아니라 ‘성(性)의 혁명’이 될 것이기도 하다는 예고탄과 같다.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패하고 부조리한 사회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이 소설을 완전히 믿기로 했다. 그리고 이벨린을 따라가기로 했다. 설령 그가 혐오적 발언을 들어야 하거나 차별적 위치에 놓이더라도, 그것이 우리 사회의 일면과 무관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며 혁명의 순간을 기대하기로 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깨달았다. 이벨린은 이미 차별과 혐오를 부수고 혁명할 준비가 단단히 된 사람이라는 걸.
출발, 새로운 이름들
이 소설의 1부는 전체적으로 이벨린의 주변을 꼼꼼히 톺아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이벨린의 개인적 활동 영역, 또는 이벨린과 직접 관련 있는 장소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세트론 대학, 영지, 집, 버밀리온의 집 정도가 될 것이다. 독자는 이벨린이 사회적 계급이나 신분이 높은 상태임에도 주변에 상당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둔다는 것을 금세 깨닫는다. 이벨린은 집이나 영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벗어남’을 욕망한다. 자꾸만 대학으로, 학교로, 도서관으로, 버밀리온의 집으로 간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과 어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실상을 보고, 끝내 그들을 돕거나 구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벨린은 집과 ‘자작’이라는 권위에 갇혀 있을 때 보지 못했던 넓은 세상을 학교에서 만난다. 그곳에서 도망친 것은 이벨린 자신이었으며 그것은 계급에 대한 깊은 불신이 이벨린의 마음 깊이 깔려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벨린의 주위에는 공화주의자가 많다. 공화정을 지지했던 사람, 과거에 공화주의를 지지해서 고초를 겪은 사람, 또는 그럴 뻔한 사람. 도서관지기인 알렌 랜포드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알렌은 버밀리온의 집 아이들에게 각별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계급에 항의하는 이들을 통해 이벨린은 군주제, 특히 그 안의 계급주의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목도한다. 공화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리고 넓은 세상을 돌아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이벨린의 생각은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이녹을 포함한 버밀리온의 집 아이들은 이벨린이 자작의 지위에 있었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상황을 보여준다. 물과 음식이 없는 사람들, 차라리 걸레에 가까운 옷을 걸친 이들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음을 이벨린은 무의식 중에 체험한다. 게다가 그들은 이벨린을 “계집애나 후계자로 보지 않았다”. 이벨린은 오히려 그들 사이에서 “편하고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다.
그런 한편에는 계급주의를 지지하고 호시탐탐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권위나 지위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1부의 후반, 버밀리온의 집 아이들과 이벨린이 준비한 낭독회에서 벌어진 사건은 권력에 취한 그들이 대중과 서민을 보는 시선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자신과 동일한 티켓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부랑자”라고 칭하는 한 남자의 조심성없는 태도는 매우 불쾌하다. “저 더러운 자를 여기서 치워라”라고 말하며 상대를 내동댕이치다시피 하는 그의 말은 이벨린에게 ‘기괴함’으로 다가온다.
“이 공간이 언제나 깨끗하도록 쓸고 닦는 사람은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주름지는 최고급 원단으로 지은 교복을 입은 그가 아니다. 학교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해지고 삭은 바지 자락이 방금 내동댕이쳐지면서 찢어진 아저씨였다.”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보통 사람들이 이유 없이 홀대 당해야만 했던 그 상황에서 이벨린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의자 후려치기’가 괜히 등장한 것은 아닐 테다. 이벨린은 이미 하치의 설명과 기사였던 시절의 기억을 통해 익숙한 풍경이 유지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손이 필요한 지 숙고한 바 있다.
“이를테면 이 사람들은, 이 학교의 군복을 만들고 가죽 갑옷과 군화를 꿰매고 면과 린넨을 짜는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인 것이다. 군인 한 사람이 제식에 맞는 군복을 입고 건강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는 데 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다. 이 사람들은 (…) 학교의 평범한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한다. 평범하게 물동이에 깨끗한 새 물이 차 있고 복도 끝마다 서 있는 시계의 태엽이 잘 감겨 있고, 때 타지 않은 깨끗한 커튼이 강의실 창가에 흔들리는 풍경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벨린이 점점 더 좁은 세상에서 빠져나와 큰 사회의 진실을 마주하도록 이끈다. 익숙한 곳을 낯설게 보도록 하고, 경험이 넓어지는 동시에 깊어지도록 돕는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범인(凡人)은 ‘보통의 일상’이라는 기준이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없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벨린이 사는 곳,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곳에서 누군가에게 익숙하고 평범한 일상은 다른 누군가에게 고군분투의 결과물이다. 가문의 특성상, 그리고 개인의 자유분방하고 매여 있지 못하는 성격상 다양한 계층을 만나본 이벨린의 경험은 훗날 혁명을 하는 데에 어떤 도움으로 작용할까. 그 내면의 불꽃은 이미 이때부터 타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목격한 수많은 불합리함은 작게 일렁이는 파도가 되어 이벨린의 내면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이벨린 에레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벨린은 계급적 차별뿐 아니라 성적 차별을 마주하기도 했다. 캠퍼스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들어야만 했던 성적 모독과 크고 작은 비방은 더하거나 덜함 없이 소설에 상세히 묘사된다.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네, 여자가 옷차림이 왜 저래, 아 저 사람이 그 에레드 자작이야?”
”이벨린은 평생 어딜 가나 튀는 존재였다. 귀족이라서, 여자라서, 귀족 여자인데 기사이고 장교라서”. 한 사람에게 여러 정체성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적인 성역할에 여전히 매여 있는 사람들은 여자와 기사가 양립할 수 없고, 여자와 대범한 성격이 양립할 수 없고, 여자와 활동적인 옷차림이 양립할 수 없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보는 그는 귀족 이전에 여자였다. 그들과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그리고 어딘가 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도 되는 여자.
물론 여기에 이벨린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이벨린은 “장기판의 말이나 도박판의 주사위”가 되기보다 “장기판이나 도박판이든 쪼개버리”는 사람이다. “남과 같은 셈법”,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라는 계산속은 “누가 내 머리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그녀의 신조는 서서히 이 세상을 바꾸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벨린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군림하려는 자에게 역으로 군림하고, 업신여기는 자를 역으로 업신여긴다. 숨고, 외면하고, 낙심하지 않으며 분연히 일어나 전진하고 직면하고 맞선다. 그가 의자를 집어들고 내리치는 것, 상대의 말에 분개하는 것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불합리를 견디는 것이, 심지어 유디트를 사랑하는 것마저 일상의 혁명처럼 보이는 이유는 언제나 당당한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러니 이벨린 에레드, 이름만이 그를 완전하게 설명한다. 어떤 직업도, 호칭도, 성별도, 외모도, 사회적 지위도 이벨린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모든 틀을 벗어던지고 남은 단 하나, 오직 이름으로 이벨린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낸다. 틀과 규칙과 법칙을 버리고 부수고 깨뜨리는 방식으로.
마치며
이벨린의 여정, 특별히 1부는 ‘사람들’로 요약할 수 있다. 이야기를 세 부분으로 나눌 때 흔히 첫 덩어리는 여정의 시작이나 그 준비 단계로 본다. 이벨린이 떠나는 여정은 혁명이 될 것이므로 그는 1부에서 사람을 모은다. 그리고 유감없이 썩어버린 사회를 휘젓고 다닌다. 그러나 그 행동 하나하나에 담긴 섬세함은 무시할 수 없다. 마치 자신이 혁명하려는 세상이 이토록 부조리하다고, 그러나 그 안에서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이 있으며,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으며, 자신도 그 중 하나라고 이벨린은 말한다. 귀족이자 상위 계급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위보다 자신의 주변을 더 돌아보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 휘둘리는 것을 경멸하며 누군가를 휘두르려는 사람을 부쉬야 직성이 풀리는 그만의 혁명이 어떤 모양으로 완성될지 기대가 된다.
오로지 자신으로 살려고만 하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세상에, 잊힌 신이 내리는 이 계절에, 도무지 잊혀지지 않을 이름을 기억하는 이벨린이 나아갈 모든 방향에서 일어날 다채로운 사건을 가만히 지켜보아야겠다. 그리하여 완성될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 이벨린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잊힌 신과 그것이 내리는 계절이란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순간까지의 여정에 한 명의 사람으로, 혹은 동료로 함께해야겠다. 나의 위치는 어디일까.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작은 혁명을 이룰 수 있을까.
믿을 만한 사람의 곁에서 발을 맞춘다는 것은 이토록 즐거운 일이다. 그가 마침 혁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