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상실로부터 빚어집니다. 무언가로부터 향해가는 마음이 양방향이 아닌 단방향이 될 때, 그리고 그 향했던 감정이 결국 도착지를 잃고 방황하게 될 때 그리움은 짙어집니다. 혹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야기의 마침표라고. 하지만 그리움은 상실로부터 건져 올려진 상대와 관계를 맺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볼 때, 대개 현재 속에서 상대를 바라봅니다. 그 현재가 쌓이고 쌓이겠지만, 대부분은 함께함에 방점을 두고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렇게 한없이 쌓아 올려진 상대라는 탑에서, 상실을 겪고 나서야 탑은 완성되고 우리는 그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나로부터 완성된 상대를 반추하고 바라보는 일. 그 것이 그리움이고 소회 밖에 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애수는 각 인물들의 상실과 그리움을 조망하면서 이를 구체화합니다. 새하얀 양말을 뻘에 묻는 일은 그 중 하나입니다. 북독일인이기에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살아온 환경뿐만 아니라 그의 성향까지 포함한 발언일 겁니다. 그 것은 일종의 세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운 환경 속에서 추위를 개의치 않는, 그리하여 매서운 파도 속에서 다정함을 상기하는 태도를 어찌 사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그의 말을 추모하며 애도하는 행위는 그의 말을 작품 전면으로 가져오며 테마화 하며 확장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선 차가운 무덤 속에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을 것이기에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요.
얀은 자신이 바라던 것에 충실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영화계에 욕심이 있어 재능 있는 다른 감독들을 질투한 사람. 자신이 어릴 적 보았다는 그 기묘한 파도에 빠져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려고 한 사람. 밀물 때를 지키지 못해 죽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바다는 무섭습니다. 그러나 얀이 언젠가 봤다는 한스처럼 다정한 면모를 지니고 있기에, 그 양가성에 현혹되어 스스로를 산화한 사람. 하지만 비극이라고 축약하기엔, 열정적이고 충실한 삶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연작 소설로써 충실하게 구현됩니다. 세 편의 소설을 모두 읽었다면 보이는 연결점은 괜스레 반갑게 느껴질 정도로 명징하나, 그 것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며 강제적으로 연장을 얽매지는 않습니다. 소설은 한 편의 단편 소설로써 완성되며 충실한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 지점에는 새로운 인물, 카일이 있습니다.
카일이 겪은 기묘한 호수에서의 체험은 얀의 기묘한 체험과 오버랩 됩니다. 그 오버랩은 토할 것 같다는 말을 하는, 나의 하얀 양말을 묻어둔 경험과 이어지며 기묘한 연결점을 제시 합니다. 그런 점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차 안, 얀의 자리에 카일이 않는 것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합니다. 특히 카일의 열정적인 여행의 이야기는, 얀과 마찬가지로 열정적인 삶의 편린을 보게끔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얀과 카일 둘 모두 그리움을 품고 있음을 넌지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얀이 유년의 편린으로부터 시작된 세계에 대한 사랑이, 그리움의 원형이라면, 카일의 그리움은 막역한 자신의 뿌리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리고 세계에 뻗어있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추적은, 얀과는 다른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사랑’의 결과물일 겁니다. 그 것을 정의내리자면 서로가 이어져있다는 확신 어린 추측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미 다들 죽어서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왠지 연결되어 있음을 느껴”라고 말하는 카일의 이야기는 그 막막한 그리움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흔적으로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존재는 상실을 겪은 이들이 세상을 마주하고 안도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리고 그 것이 유효한 까닭은 그리움을 통해 상대뿐만이 아닌 자신 역시 반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