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덴뿌라를 위한 자아 대면의 필요성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팽이버섯 덴뿌라 (작가: 일월명, 작품정보)
리뷰어: NahrDijla, 22년 4월, 조회 55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월명님의 소설 <팽이버섯 덴뿌라>는 관계에 대해 다룬 다면적인 소설입니다. 관계와 갈등, 그 중에서도 특히 가스라이팅이 눈에 띕니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입맛이 싸다는 남자친구의 발언이나 튀김을 강압적으로 먹여, 끝내는 트라우마가 생기게 한 어머니의 행동들을 두루 가리킬 수 있을 겁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행위에는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좋아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것은 타인에 대한 소유욕, 그러니까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무언가 입니다. 물론 의도는 좋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의도만 좋다는 게 문제죠. 소설에서 남자친구라는 존재는 좀 더 골고루 먹기를 바란 의도에서 발언을 한 것처럼 보이고,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성인병을 염려해서 튀김을 먹지 않도록 지도 했을 겁니다. 전부 ‘나’를 위한 발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실체를 보자면 어떨까요.

이들의 발언은 동일한 입장에서의 주체와 주체의 대화는 아닌 듯 보입니다. 오히려 불균형한 입장인 주체(어머니, 남친)와 객체(나)의 관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상대방의 ‘좋아함’을 평가 대상으로 올려놓고, 재단하는 것을 과연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는 상대방의 좋아함, 즉 기호와 욕구 등 개인적 요소들 위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놓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죠. 그 것은 결국 폭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깎여나가기엔, 우리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폭력은 일종의 에고이즘(egoism)일 겁니다. 즉 자기의 욕망 충족이나 이익 추구만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그 행동이 타인이나 사회 일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5년지기 친구인 재준의 존재와 대비됩니다. 어머니의 ‘지도’에 튀김을 싫어하게 된 나는 재준의 머스터드와 치킨 무를 곁들인 닭튀김에 다시금 튀김과 해후합니다. 여기서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치킨을 권하면서도 ‘억지로 먹지는 말라는 권유’는 상대를 객체로 보는 것이 아닌 주체로 바라보며 존중해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가는 위트 있게 여기에 더해 재준이 치킨집 자식임을 넌지시 제시합니다. 튀김을 좋아하는 사람의 치킨집 자녀와 친구를 맺는 것은 이 회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있기에, 어머니의 가스라이팅 속에서도 자신의 좋아함을 버리지 않고 회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남자친구의 가스라이팅을 겪었을 때, 주인공이 팽이버섯 덴뿌라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의 주체성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즉 상대의 좋아함보다 자신의 좋아함을 소중히 하는, 그렇기에 자신을 인지하는 과정입니다. 실패했다고요? 그럼 어떤가요. 좋아하는 것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의 목적성을 회복하고 마주하려는 것인데.  물론 대실패를  해선지, 주인공은 자신이 팽이버섯 덴뿌라를 좋아하는 것을 회의하게 될 정도로 실의에 빠지지만, 그래도 자신을 찾아온 친구의 튀김 덕분에 벗어나게 되니 다행이죠.

어쨌든 튀김은 맛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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